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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Jul 08. 2021

마흔에 재정의 되는 친구의 정의

친구.


태어나면서부터, 가족 관계에서 폭이 넓어짐에 따라 나는 언제나 친구가 될 만한 사람을 가늠하는 일이 가장 힘들고 애달팠다.


어쩌면 마의 인간관계는 아주 어렸을 적, 유치원에 가서 놀 친구가 있느냐, 동네 골목에 나섰을 때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친구가 있느냐 등의 문제로부터 시작했다.

더 커서 학교에 입학했을 때 같이 짝이 되고 싶은 친구, 화장실을 같이 갈 친구, 점심을 먹을 친구, 더 커서는 조별 과제를 선뜻 함께 하자고 나서 주는 친구.... 수학여행 갈 때 옆자리에 함께 앉자고 해주는 친구가 있느냐로 늘 골머리를 썩혔다.



그 시절의 친구관계가 나를 규정하는 것 같았고,

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너무나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친구가 다가오길 언제나 갈망하며 가슴을 콩닥댔고, 언제나 친구가 있었으나 단짝이냐, 단 한 명의 절친이냐 정의 내리기 아리송한 무리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는 곧잘 홀수라 두 명이서 짝을 지을 땐 내가 지레 먼저 '나 혼자 앉을게, 나 혼자 할게'를 말했다.


 그리고 곧잘 의례 나는 혼자였다.


 친구를 사귈 수 있느냐, 얼마나 그 안에서 진하게 교류하느냐, 신의를 다지느냐, 지속되느냐, 등의 잔잔한 물의 파문 같은 수천 겹의 정의로 관계를 규정할 수 있을까?



좋다가도 싫증 나고, 믿었다가도 묘하게 배신감 느껴지고 내 맘같이 않았던 친구관계의 틀에서 벗어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결혼하면서부터 확실히 '단짝'에 집착하지 않았던 듯하다. 

사실은 더 먼저, '나는 혼자여도 괜찮다, 아니 혼자이고 싶다'라는 생각을 서른 즈음에 했던 것 같다.



나의 마음과 진정성을 배신하지 않는 것.


그것은 상대에게 달려있지 않음을 조금씩 알기 시작했던 때는 아마도 노량진에서 공부할 시간을 위해, 감정 소모를 하지 않기 위해 혼자 공부하고 자 밥 먹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 후로 혼자여서 행복한 시간은 그동안 수많은 지질한 나의 모습이 남에게 초라해 보이지 않기 위한 수였다는 걸 인지한 후,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좀 더 애썼던 듯도 하다.


타인에게 굳이 내가 어떻게 보일까, 조바심 쓰느라

애썼던 지난날의 내가 안쓰럽고 불쌍해서.

끈 떨어질까 봐 늘 조바심 내던 친구를 붙들기 위해 필요 이상의 마음을 썼던 시간들이 아쉽고 아쉬워서.


하긴 그랬으니 알게 되었겠지.

너무 나를 상처 주면서까지,

나를 잃으면서까지 필요 이상 애쓰며

유지하는 친구사이는 유해하다는 걸.

아주 치명적으로 나를 갉아먹는다는 걸.


마흔이 넘어 정의하는 친구는 이러하다.


나와 다른 점을 너그러이 수용하며 비판하거나

내 가치관에 맞게 길들이려 조언하지 않기.

마음이 힘든 날, 불쑥 전화 걸어 나를 좀 봐달라고, 어찌할 수 없는 내 마음을 좀 들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


친구의 좋은 일을 정말로,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주기.


슬프거나 수치스러운 일을 털어놓을 때도 뒤돌아서서 '괜히 말했다'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기.


그 어떤 관계든, 나를 잃으면서까지 불편하게 유지해야 할 관계는 거리를 두자. 그런 사이는 거부하자.


 티 너무 내서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더라도 적절히. 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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