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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Sep 11. 2021

아세요? 양육에도 때가 있대요.

아이와  나를 위한 귀촌

오은영 박사님의 영상을 보며 점심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자녀 양육은  아이의 자립을 목적으로 해야 해요. 아이가 어렸을 때는 부모도 한창 살기 바빠서 아이만 바라보기 어려운 때에요, 한창 일할 나이대이기도 하고요. 그러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부모는 더 늦기 전에 아이와 시간을 보내려고 밀착해요..."


뭐 그런 이야기였다.




나의 시골 라이프 이야기를 보며 사람들은 정말 부럽다고 말한다. 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넘치고 정말 잘 논다고. 아이와 잘 놀아준다고. 맞다. 그러기 위해 모든 걸 잠깐 멈춤 하고 아이와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교사라는 직업 대신에 두 아들의 엄마라는 직업을 완전히 덧입었다. 원래도 엄마였지만 뭐랄까.... 직업의식을 가지고 엄마의 옷을 입기로 한 것이다.


떠나오기로 결정적 마음을 먹었던 건...

내가 감정 컨트롤 불능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단지... 아이들에게만. 얼마나 소름 끼치는가. 아이들이 믿고 의지하는 엄마가 밤만 되면 체력소모나 지쳤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함부로 화를 내고, 짜증내고, 울고 그랬다는 것은. 그것도 자주, 종잡기 힘들게, 갑작스럽게....


(타인에게 나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말을 아껴두었지만.. 그리고 나의 치부인 것 같아 숨겼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마 극복되었나 보다. 그때 내가 그러면 안 되었는데 힘들었나 보다.. 인정했다.)



다정하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아이들이 잠을 시루며  두 시간씩 잠을 못 들면 난 불같이 화를 냈다. 제발 좀 자라고.

 아이들을 정성껏 밥해 먹이고 씻기고 안아줘 놓고, 쿵쿵 뛰기 시작하면 아래층에 피해 준다고 무섭게 소리 지르고, 말 안 들으면 심하게 패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삭이고 삭이다, 아이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불같이 화풀이 해댔다. 지금도 제일 싫은 건... 나는 아이들에게 그래 놓고 화를 나게 한 당사자에게는 화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로지 내 편이고 순수한 아이들에게만 화를 냈다.


 아이들과 문밖을 나가는 순간 가면을 썼다.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타인에게 다정한 가면을. 다정함을 나의 타고난 결이라고 생각하며 평생 살았는데 나는 엄마가 되고 집으로 돌아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피곤이 찾아오면... 자주 폭력적인 인간으로 변했다. 그 모습이 그동안 나의 숨겨진 본질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하게.


나는 어느 밤, 멈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멈춤을 지지하듯이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말도 자주 했다. )  멈추고 귀촌해 자연에서 우리들만의 시간을 쌓아가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우리는 귀촌했다.

엊그제, 아침.

누가 뭐라 할 겨를 없이 아들과 나는 동시에 눈을 떴다. 가을 아침 햇살이 구릿빛 아이의 피부에 내려앉아 눈부셨다. 건강한 빛이었다.


"엄마, 나 엄마가 이제 안 아파서 너무너무 행복해. 엄마가 오래오래 우리 옆에서 안아줬으면 좋겠어. 엄마랑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행복해."


문득 도시 근로자였을 때 내가 퇴근 후 자주 이런 말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휴... 죽겠다. 아파 죽을 것 같아."


아이들은 고사리 손으로 다리를 주무르며 죽으면 안 된다고, 그러면 누가 자기들을 돌봐주냐고 묻곤 했다. 아이들의 불안과 걱정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나는 그냥 누군가는 너희를 돌봐주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엄마가 힘들다는데 요것들은 이기적이게 자기들 살 궁리만 하는구나라며 서운할 정도로 내 마음은 서럽게 썩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아이의 불안을 무심히 넘기며(오히려 서운해하며) 해야 할 일들 투성이의 현실을 꿋꿋이 살아 넘기기 바빴다. 뭐 책 읽어주고 주말엔 놀아주고, 애쓰니까... 나도 최선을 다한다고 위안 삼으며.


그런데 그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나의 쾌하고 고단한 감정들은 한창 감수성 예민한 유년기에 독이 되었을 것이다. 자존감, 내적 불행 같은 것들에 영향을 주어 깊은 상처가 될 것인데 천연스럽고 무해한 아이들은 미성숙한 엄마의 잘못을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을 것이다.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밤마다 괴물이 되는 내가 너무 싫어"

남편에게 말했다.

쉬어야겠다고.


남편이 말했다.

  잘 생각했다고.

 걱정돼 쉬라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서 뭐라 말을 못 했는데   고단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지 않아 불안했다고 했다. 언제나 그렇듯 충분한 자격 되니 쉬라고. 실컷 아이들과 놀라고.


그렇게 나는 남편의 적극적 지지를 받으며 집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어있는 농가로 옷가지만 챙겨 와 지내고 있다.


 

 어제 아이를 재우고, 밀라 논나의 에세이를 읽었다. 그중 가장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구절은 다음과 같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워킹맘들이나 후배들에게 당부한다

"양육에도 때가 있어요. 때를 놓치면 회복이 힘들어요. 물론 커리어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역할 중 하나가 좋은 부모가 되는 거예요. 삶의 우선순위를 알고, 삶의 본질에 파고 드세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코 에코가 생전에 한 말이 있다. '인간이 죽음을 뛰어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좋은 글을 남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좋은 자식을 남기는 것이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장명숙) 중



 이 구절을 읽고  위험하다는 내면의 신호를 넘기지 않고 멈춤 한 나 자신이 대견했다. 내가 고민하고 반성한 결과 내 삶의 본질은 '좋은 부모, 행복한 나'로 살면서 자녀들이 건강한 어른이 되어 자립하도록 에너지를 내어주는 일이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다. 그렇게 아이들과 내가 선택한 길에서 불필요한 상처와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며 순간에 집중하는 지금의 삶이 감사하다. 


오늘도 아이들과 자연으로 나가 힘껏 놀았다. 내 잉여 에너지도, 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도 푸른 자연은  그대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아름다움은  어떤 무형의 행복감으로 우리를 다독여 주었다.


 그렇게 나는 불필요한 감정과 고단함을 해소하려 물질적인 것으로 하루를 소비하지 않게 되었으며 대신, 아이들과 소소하고 간지럽게 즐거운 경험으로 하루를 채움 하고 있다. 아이들은 많이 웃었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짜증도 냈으며, 형제들은 치열하게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더 이상 엄마가 아파서, 피곤해서 죽을까 봐, 밤마다 엄마가 불시에 화를 낼까 봐 눈치 보지 않는 5살, 7살 한때를 충실히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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