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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Sep 29. 2021

거짓말하지 말라던 너에게

자신의 인생에 '나'는 없고 '나의 이야기'도 없다면.

문학 수업을 좋아한다.

정철의 '관동별곡'을 참으로 좋아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표현이 절묘하기 때문이다.  직접 그곳에 가보면 달리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관동별곡에 나온 대로 수긍하게 된다. 작자가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며 절승을 두루 유람하고 소감과 풍경을 읊은 바에서 세기를 뛰어넘는 공감을 이끌어내기란 실로 쉽지 않은 일인데 그는 완벽하게 그 일을 해냈다.


아무튼, 학생들은 관동지방의 절경과 놀라운 표현력은 둘째치고 익숙하지 않은 표현과 단어들, 고전의 벽에 부딪혀 고개를 가로 흔든다. 그리고 나지막이 내뱉는다.

"젠장... 시험에 나올 거 엄청 많겠네."

그렇다. 문제 내기 좋은 작품이다.


작품 읽으며 그림도 그려보고, 만화로도 표현해보고 참여도를 높이려 애쓰지만 아이들은 이미 지쳤다. 그 표정을 안다. 시작도 하기 전에 글에 질려버린 표정을. 매년 익숙하다.


굉장히 나른한 오후의 수업시간에 나는 아이들의 저세상 텐션과 이목을 좀 끌어보려고 사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다름 아니라 나는 강원도 남자랑 연애하고 결혼하지 않았던가. 관동별곡에 나오는 곳곳을 그 남자와 함께 했다.


 양양 하조대, 친구들과 모임인 자리에서 다툼이 있어 내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데, 내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너는 나가지마'라고 했다고 이 얼빠진 남자 친구가 나를 찾으러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끝끝내  내가 아닌 친구만 챙겨서 (아직도 이해불가. 그와 결혼한 나는 더 이해불가) 양양 낙산사에서 헤어지고 둘이 마지막으로 속초 영랑호를 돌며 엉엉 울었던 이야기. 그가 보고 싶어 고성 팔경을 혼자 여행 갔으나 그에겐 연락을 안 했던 이야기 등등...


졸던 아이들은 5교시 졸음의 무게를 이겨내고 눈을 빛냈다. 그러다 결국 그 남자와 결혼하게 됐다는 부분에서는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 어떤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경험을 해요?우리 재밌게 하려고 지어낸 이야기죠?"

그 말과 함께 수업 마치는 종이 울렸다.


아이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가끔 내가 들려주는 내 삶의 이야기가 다 지어낸 이야기 같다고. 자기는 평생 살아도 그런 경험을 다 못할 것 같다고. 나는 그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없어요. 뭐 어린이집 다니다, 학원 다니다, 학교 들어가고 학원은 더 다니고. 뭐 경험이라 할 게 없어요. 선생님 정도 되려면 더 많이 학원 다녔을 거 아니에요?"


아이의 인생에 기억이 남는 일은 학원 다니고 무언가를 항상 배우는 일이라고 했다. 그때 내가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좀 안타까웠던 거 같다. 종내 그 아이는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내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이의 딱딱한 마음과 단호함, 그것만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많이 배우고 학원도 많이 다닐 수도 있는 일이다. 배움의 기회와 여건이 되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도 인생의 경험 중 하나다. 그러나 거기서 자신만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다면 인생의 자율성과 주체성은 조금도 없는 되는 건 아닐까. 자신의 인생에 '나'는 없고 '나의 이야기'도 없고, '누군가에 의해'만 남는 원망과 남 탓의 역사만 남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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