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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Sep 27. 2021

밤 조림을 만들며

알밤의 이야기를, 나의 쓸모를 생각하는 가을밤

 엄마와 마당에 앉아 밤이 깊어가도록 알밤을 깠다.

칼을 쥔 손가락이 아프다, 감각조차 무뎌졌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아침에 주운 산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까도 까도 가득한 든든한 알밤.


아이들은 그 옆에서 자기들만의 놀이를 시작했다. 카페 놀이. 밤 까는 우리에게 생수도 팔고, 캔커피도 팔았다. 그러나 끝끝내 같이 밤을 까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단순하지만 고된 작업이었다.


 뻣뻣해진 허리를 두들기며 엄마는 상처투성이 손으로 임금님이 귀한 날만 먹었다는 '타락죽'을 만들었다. 나와 내 새끼들을 먹이겠다고. 타락죽 한 그릇은 든든하고 담백해서 몸도 마음도 단단해지는 느낌의 식사가 되었다.


이튿날, 엄마와 시장터에 앉아 중앙시장의 제일약국이란 오래된 일제 건축물을 그리다 알았다. 밤 2킬로그램에 단돈 천 원이면 밤을 금세 깔 수 있다는 걸. 시장 안에 들어선 할아버지들은 연신 우리에게 밤 까는 가게가 어디냐고 물었다. 우리는 지난밤의 괜한 수고와 노동을 너무 안타까워하며 다음날, 산에서 주운 밤 7킬로그램을 비닐에 넣어 시장 안 밤 까는 가게에 갔다.


"세상에, 이렇게 밤 까는 기계가 있는 줄 모르고 밤 깐다고 손가락 관절 아파서 죽는 줄 알았어요."

"허허허, 어데 살아요? 상주 사람 아닌가 봐. 밤 까는 기계 나온 지 10년도 더 됐는데."

나는 밤 까는 기계 앞에 앉아 신기해하며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아줌마는 우리가 가져온 가을 알밤을 보며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진짜 알밤이네. 산이 키운 밤. 진짜 예쁘게도 생겼다."


안타깝게도 밤 깎는 기계는 정교하진 않아, 7킬로의 밤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덜 깎인 부분을 깎고, 벌레 먹은 부분은 도려내어야 했다. 그리하여 엄마와 난 또 야밤에 칼을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밤 조림을 만들었다. 유기농 설탕과 소금 한 스푼을 넣고 작고 작은 알밤을 조렸다. 밤이 익어갈수록 진한 황금빛이 되어갔다. 타지 않게 졸이며 눈을 감고 이 작은 알밤을 품었을 밤나무를 생각했다. 초봄 앙상한 밤나무에서 짙푸른 여름과 열매를 떨어뜨린 가을. 그리고 다가올 겨울. 알밤들은 그렇게 시간을  견뎌 굴러 굴러 나에게 왔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단순하게 해내는 작업에 들인 나의 노고는 밤 조림으로 완성됐다. 그 시간 동안 밤의 역사를, 나의 역사를, 나의 쓸모를 더듬으며 작은 희열을 느꼈다. 달큼한 밤 조림을 입에 넣고 두 눈이 휘둥그레 지는 아이의 얼굴, 만족하는 엄마의 얼굴 모두 모두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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