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다리딩 Dec 23. 2021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오빠들

중학교 때 친구가 그녀의 남편과 함께 내 그림을 걸렸다는 이유로 전시회를 보러 내려왔다. 쌀쌀하고 매서웠지만 춥지 않은 저녁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잠이 안 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중학교 때 좋아했던 오빠가 생각나서 몇 시간 인터넷을 뒤진 결과 결국 SNS에서 그를 찾아냈다고 말을 슬쩍 흘렸다. 다른 남자들도 찾아내고 싶었으나 이제는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못 찾았다는 아쉬움도 내비치며.


친구는 닭발을 먹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큰 소리로

"야! S.S.L 오빠?"

"야, 조용히 해. 작게 말하라고.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친구는 남이 좋아한 남자임에도, 어제 그제 기억도 가물거리는 기억력을 가졌음에도 정확히 그 이름을 기억해 내  또박또박 외쳤다.


"누가 듣기는, 여기서 우리가 제일 나이 많아서 아무도 몰라. 너는 예나 지금이나 그 오빠 이름만 말하면 바로 나오는 얘기가 조용히 하란 거야. 크크킄"


그녀의 남편은 우리가 어떤 얘기를 하든 묵묵히 닭발을 씹으며 예전 대학교 때 먹었던 그 맛이 아니니, 주인이 바뀐 것 같다느니, 예전엔 대학생들 진짜 많이 왔던 집이라느니 하며 홀로 조용히 추억에 잠겨 있었다.


"너 큰일 날려고! 왜 찾아봐? 너 남편한테 다 말한다!"


"어휴~ 괜히 았어."


나는 핸드폰에서 그 오빠 계정을 검색해 친구에게 보여줬다.


"왜~ 우리 나이에 아저씨가 된 건 당연하지! 근데 똑같이 생겼다. 키는 그때도 작더니 전혀 더 안 컸네. 고등학교때도 이 오빠는 이렇게 키 작고 귀엽게 생겼었어. 흐흐흐. 너는 키가 멀대같이 크면서 맨날 고 귀여운 남자 좋아했어. 봐봐, 아들이 똑같이 생겼어, 오빠랑."


기억 속에 오빠는 더 마르고 어딘가 우울한 구석이 있고 나름 멋이 있는 오빠였다. 공부는 못했을지언정 인생의 멋은 알 것 같은 기대가 이는 남자였다. 그런데 나는 호기심에 그가 팔로잉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눌러봤다가 기겁을 했다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했다. 세상에, 모조리 헐벗은 여자들, 심지어 성인잡지 모델 같은 여자들만 몇 백 명을 다 팔로잉하고 있다고.


그녀는 신나 닭발을 뜯다가 콜라를 따면서 실망의 기색을 내비쳤다. 어쩌다 한 두 명은 그럴 수 있다지만 모조리 수백 명을, 그것도 갓난쟁이 애를 둔 아빠가 팔로잉하고 있다니, 약간 우리는 경멸의 눈빛이 오갔다. 그런 욕망 하나 본성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대놓고, 숨기지도 않고! 좋아요를 누르며 다니다니!


내가 그 시절 좋아했던 오빠는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러게. 좀 실망이네. 나도 그때 좋아했던 오빠가 있었는데 되게 귀여웠어. 초등학생처럼 작고 눈이 크고 순진해 보였는데. 근데 이름이 뭐였더라?"


친구의 말 끝에 골목길에서 떡볶이를 먹고 나오던 우리를 쳐다보던 순진한 눈망울의 공고 오빠가 떠올랐다. 그런데 나 역시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름만 알아도 sns바다를 뒤질텐데. 그대신 우리랑 같이 어울린 친구'으니'가 좋아했던 오빠. 순대집 오빠 얼굴이 정확히 떠올랐다.

"으니가 좋아했던 순대집 오빠는 순대집 이어받았으려나?"


"아니, 아줌마가 할머니 돼서 순대집 하고 있더라고. 나 여기 내려와서 제일 먼저 가봤잖아. 순대도 못 먹으면서 맨날 그 오빠 보려고 순대집 데려가는 통에 내가 순대를 좋아하게 됐지. 그러다 으니가 순대집 옆에 빵집 오빠 좋아하는 통에 순대는 더 이상 안 먹고 빵을 먹기 시작했었지! 크크크"


"야! 그리고 보니 우리가 그 시절 좋아하던 오빠들은 다 공고 다녔어. 그러고 보니 한결같은 스타일을 좋아했다 우리. 착하고 귀엽고 성실한 남자."


친구 앞에서 여전히 '착하고 성실하고 귀여운 오빠'는 남편이 되어 묵묵히 닭발과 계란탕을 오가며 먹고 계셨다.


"우리는 어쩌면 그 시절 넘치는 마음의 열정과 간질거림 때문에 좋아할 대상을 찾고 다녔는지도 몰라. 우리 눈에 띄면  당장 어떤 이유를 대서건 좋아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나는 진짜 그랬다.


여자들만 다니는 중학교, 지독히도 안 오르는 성적, 무료한 수업, 재미없는 나날들, 좌절과 경쟁, 무력감이 판치는 학교를 파하고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 먹고 도서관을 다니는 단조로운 동선에서 마음을 쏟고 싶은 대상을 찾고 싶었었다.


 그리하여 그 시절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이름은 모르되, 도서관에서 같은 자리에 앉는 공고 오빠, 청소년 문화제에서 노래는 더럽게 못 부르면서도 꿋꿋하게 임했던 공고 오빠, 내가 우는 모습을 세 번 마주친 공고 오빠, 오토바이를 타고 좁은 시내를  반항하듯 질주하던 공고 오빠, 뭐하나 능력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의 슬픈 사연 하나 가질 것만 같은 모자라고 애처로운 남자들이었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외롭고 욕망이 들끓는 우리의 레이다망에 걸려든 공고 오빠들. 인문계 애들보다 찐하게 세상을 알 것 같고 뭔가 아픈 사연 하나쯤 있을 것같고, 재미도 있을 것 같은 공고 오빠들에 잘 빠져들곤 했다. 아는 것 아무 것도 없이 공상과 상상에 기대를 보태어  그들을 멋있고 사연있는 남자로 만들어내어  좋아하고는  손쉽게 대상을 바꾸기도 했다. 대화도 한 번 안해본 등하교길에 어쩌다 마주친 남자들이므로.


어쨌든 우수짙어 보이는 공고 오빠들 옆에서 어떤 슬픔이든, 어떤 인생의 무게든 내가 나누고 싶었던 것 웬 오지랖이란 말인가. 그들의 슬픔과 결함이 클수록 마음의 깊이도 짙어질 것만 같은 망상의 나날들. 나조차 제대로 내 생을 살아가지도 못했으면서 조그만 가슴엔 일탈에 대한 열망과 드넓은 연민 같은 걸로 설레어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 시절 친구의 남편을 좋아했던 여자들에 대해 옮갔다. 왜 그렇게 여자들이 그녀의 남편을 사랑하고 따라다녔을까 세명은 궁금해하며 이유를 분석하는 사이 줄줄이 친구 남편의 연애사가 터져 나왔다. 친구가 대학에서 만난 선배라 친구가 모르는 연애사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 남편을 사랑한 여자들은 친구와 남편이  결혼하는 날, 친구를 앞에 두고 다음 생에는 우리가 같이 살자는 말을 하고 다녔을까. 마성의 남자를 내 친구가 차지한 것이다. 왠지 그녀가 부럽다.


추억이 무르익었을 때, 친구 남편을 따라다닌 그녀들 중 한 명의 집 앞에 가보자고 친구는 그녀의 남편을 꼬드겼다. 순박한 그녀의 남편 얼굴에 수줍음과 아련함이 스쳐갔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보내며 나는 '그 시절 오빠들'을 좋아했던 우리들의 마음을 떠올려보았다. 누군가를 열렬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내 모습을 소중히 여기고 어여삐 여겼던 그 때의 마음들.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빛났던 하루들.  내 안에 들끓,누군가를 기어이 좋아하고 싶은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그런  마음조차 사치같고 감정낭비같은 하루하루.


 좋아해야 할 대상이 정해진 지금은 어쩐지 조금 쓸쓸하기도 하다. 안정돼서 쓸쓸하고, 설렘이 없어 쓸쓸하고, 지금 남편이 옆에 없어서 쓸쓸하다. 그래도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오빠들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는 않은 이 모순을 뚫고 달려 집으로 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내가 돈 벌어올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