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소꿉친구
삶은 극복의 극복인 희영_3
"네 소식 들었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소식을 들으며 살 사이잖아."
"그러네. 나도 네 소식, 부모님 통해서 자주 들어. 우리 엄마가 부러워해. 희영인 부잣집에 시집가서 아줌마 쓰면서 아가씨처럼 산다고. 모임 갔다 오시면 항상 나한테 똑같은 레퍼토리로 말씀하시지. 진짜 부러워하셔."
"나보다 못할 게 없는 딸이 안쓰러운 것이겠지."
"남편이 잘해줘?"
나는 희영의 남편이 피부과 의사이고 강남의 유지이면서 잘 생기고 젊어서 행여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흔한 클리셰처럼 본처를 업신여기고 바람 피우는 난봉꾼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희영이 나의 소식에 대해 이야기할까 봐, 어찌 되었건 윤과 나에 대해 타인의 호기심을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넘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였다.
"잘해주지. 내가 어떻게 모시는데. 후훗. 그런 거라면 도가 텄지. 남편이 바깥에서 받는 스트레스, 집에 오면 편안하게 넘길 수 있도록 다독여주면 돼. 내가 원하는 것을 남편에게 요구하지 않고 남편에게 해주면 되는 거, 그게 뭐 대수라고."
희영은 일부러 털털하게 나에게 말하는 투였다. 내 앞에서 자신의 행복이 자랑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그녀의 배려였다.
"사랑하는구나, 서로."
"사랑하지. 그런데 나는 사실 고등학교 때 첫사랑 이후로 타인을 내 삶의 1순위로 세우지 않아. 너도, 들었을 소문들.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아. 아니 낳을 수 없어. 아마 엄마는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 안 할 거야, 남편과 내가 이번 생에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며 사는 거, 남편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거야. 너도 그렇게 들었지?"
"......"
희영이 비밀을 말했다면, 그건 극복이 되어서 말해도 타격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나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나의 불행 앞에서 자신의 불행 하나쯤은 말해야 우리의 관계가 위계 없이 이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비밀을 들은 나는 불편해졌다. 마치 윤을 잃고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거래하듯 말해야 할 것처럼 분위기가 흘렀기 때문이었다.
"우리 오빠, 결혼 안 했어. 알지? 오빠가 너 오래 좋아한 것? 나중에 한 번 만나봐. 40대에 결혼 안 한 남자 어디 이상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들 하는데 그런 것 아니고 오빠가 사업하느라고 바빠서 그런 것뿐이야."
"내가 누구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고."
"너 아직 젊고 예뻐. 물론 남자 있어야 사는 너는 아닌 거 알지만 그냥 친구로라도 마음 편히 만날 사람으로 두라고.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혼자 걷기 싫을 때 불러서 같이 걸으라고. 이 동네 살아. 오빠도. 오빠가 먼저 너 어떻게 지내냐고 여러 번 물어서 오늘 본 김에 말하는 거야."
나는 희영 오빠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결혼 적령기에 부모님을 통해 서로 몇 번 만나라고 들볶이기도 했지만 가까워서 불편했던 사람, 그 자신 외에 모든 집안사를 다 알고 있어서 오히려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웃음이 나오자 오랜 친구인 희영을 우연처럼 만난 것이 오늘의 행복 같았다.
"나는 네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어. 너는 노력 별로 안 해도 사실 손쉽게 얻는 것이 많은데 비슷하다고 느끼다니 웃기지? 그런데 나는 그냥 머물러 있는 내가 참을 수 없었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꾸만 더 나아지고 싶고 지금이랑은 다른 내가 내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서 노력하는 시간이 좋았다고나 할까. 너도 그런 것 같았어. 별로 노력 안 기울이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머물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못 견뎌하는 사람. 그래서 나는 네가 편하고 좋았던 것 같아."
희영은 이제 수영을 하러 갈 시간이라고 했다. 아직 커피와 빵이 남아 있어서 나는 마저 먹고 일어서겠다고 했다. 나는 희영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희영이 어쩌면 나처럼 불행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일어난 자리에 불쾌함은 조금도 묻어있지 않았다. 상쾌하고 명랑했다.
오늘을 극복하고 극복하는 희영이 멋져서 언제나 나는 희영보다는 나은 인간이라는 우쭐함이 민망해졌다. 치졸한 내 마음이 크로와상 부스러기처럼 내 옷과 접시에 마구 흩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