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친구 엄마
현숙 아줌마의 다정한 위로 _ 1
아파트를 굳이 정리해야 할까, 나는 거실에 앉아 아침과 정오 사이 깊어지는 볕의 무게, 오후의 볕의 화려함과 실종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언제나 고민은 고민일 뿐 해결책도 결심도 없었다. 일도 그만둔 이상 이 아파트를 정리해서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이 아파트에 사실 나의 몫은 애초부터 없었고 오로지 윤의 몫만 존재했는데 그런 아파트를 팔아도 되는 것일까 잠시 고민했다. 윤이 떠난 후 종종 갑자기 윤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 잠을 쉬이 들지 못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잠이 들었다 설핏 깨면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감이 오지 않았던 날들의 반복.
10개월 가까이 마음의 부채가 일어날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윤, 내가 너를 기억할게. 너의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절망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너를 잊으려고 애쓰지 않을게. 내 삶의 몫은 그것이야. 너를 기억하는 사람. 나는 너무도 너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해. 만지고 싶어서 자주 울어. 더듬을 실체가 없을 때 비로소 나는 너의 부재를 자각해.'
아파트의 가격을 재조정해서 다시 매물로 내놓고 시골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갑자기 빵이 먹고 싶어졌다. 시장에서 파는 맛이 있을까 궁금해하며, 만든 지 오래되진 않았을까 의심하며 사게 되는 옛날 빵집에서 구운 빵. 그냥 빵 말고 현숙 아줌마가 굽는 평범한 맛의 빵. 내가 돈만 생기면 집 앞 빵집에 빵사먹으러 달려갔던, 예쁘고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현숙 아줌마가 만들던 빵.
부드럽고 현란하고 궁극의 단맛과 고소함이 판을 치는 고급 빵들을 먹을 때마다 나는 현숙 아줌마는 아직도 빵을 굽고 있을까 궁금해했었다. 그녀가 만드는 빵보다 그녀가 지어주는 미소가 좋아서 나는 그 시절 자꾸만 빵을 사 먹었고 그녀의 딸인 지선이와 부러 친하게 지냈다. 지선이에게 너는 좋겠다, 엄마가 예쁘고 친절하고 빵도 잘 만들어서라고 말할 때면 지선이는 그렇지, 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선선한 눈빛이었다.
우리 엄마처럼 소리지르거나 닥달하지도 않았고, 딸을 때리지도 않았으며 못났다고 혼내지도 않았다. 아줌마는 항상 하교하는 지선이를 다정하게 앉아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내가 아는 세상에서 최고의 어른처럼 보였다. 내 세상에는 온통 나를 가르치려하고 혼내고 훈계하는 어른들로 이루어졌으므로. 나는 지선이가 늘 부러웠다. 오롯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다정하고 예쁜 엄마를 가진 지선이.
현숙 아줌마가 예쁘고 친절할수록 동네 아줌마들은 그녀에 대해 안 좋은 말을 붙였다. 어린 눈에도 빤히 보이는 질투와 멸시와 하대의 말들과 눈빛들. 그럼에도 꿋꿋했던 현숙 아줌마. 그녀를 닮아 더 친절하고 따뜻했던 지선이. 윤이 떠난 후 나는 지선이 집에 놀러 가면 현숙 아줌마가 해주었던 간식들이 자주 떠올랐다. 그 시절 지선과 나는 아줌마가 해준 홈메이드 쿠키나 주스를 마시며 우리도 행복한 여자가 되자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찐하게 사랑받는 여자가 되어 오순도순 아들 딸 낳고 살자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현숙 아줌마의 빵과 쿠키와 주스는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음식이었다.
"아줌마, 나는 아줌마 같은 엄마가 될 거예요."
현숙 아줌마는 나의 그 말에 종종 굳은 얼굴이 되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말하는 대로, 아줌마는 남편이 없을 것이었고 어쩌면 수군대는 말처럼 애인이 여러 명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선이는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지선이의 집 어느 곳에서도 아빠의 흔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직감적으로 그 부분을 모른 척 넘겨야 모녀와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 거란 것을 알았다.
그 무렵 나는 귀에 진물이 자꾸 차 오르는 귓병에 걸려서 귀가 잘 안 들렸었다. 일주일에 두 번 조퇴를 하고 엄마와 인근 대도시로 기차를 타고 병원 가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나는 그 기차 안에서 현숙 아줌마를 만난 적이 있다. 흰 망사 장갑을 끼고 하얀 양산을 가방에 접어 넣고 창가에 앉은 현숙 아줌마. 엄마는 현숙 아줌마를 싫어했고, 지선이도 싫어했으므로 나는 부러 먼저 아는 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와 아줌마가 마주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하필 아줌마와 우리는 같은 역에서 내렸다. 엄마와 아줌마가 마주치지 않도록 부러 거리를 두고 걸었다. 대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 거리를 채울 무렵 나는 조금 안도했다.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엄마의 손을 느리게 당기며 걷는 힘을 뺄 무렵 나는 보았다. 어떤 아저씨가 현숙 아줌마의 허리에 손을 휘어 감는 모습을, 아줌마는 몸을 빼지 않고 그의 엉덩이 가까이에 몸을 밀착시키곤 팔짱을 끼고야 마는 모습을. 가슴이 방망이 치듯 두근거렸다. 세상이 쿵 내려앉았다. 아줌마의 빨간 립스틱이 그를 보고 웃을 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혐오였다. 나의 마음에 이는 불쾌한 감정, 분명한 혐오였다.
귀 수술을 받고 다시 학교에 돌아왔을 때, 나는 자꾸만 지선이에게 냉담하게 말이 나왔고 더 이상 빵도 먹기 싫어졌으며 빵집 앞을 지나는 것도 싫어졌다. 나는 현숙 아줌마에게 심한 배신감과 불쾌의 감정이 솟아났었다. 예쁘고 다정하고 고운, 지금 내 나이 즈음의 미혼모 현숙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