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보물 찾기 끝에 내가 찾은 보물은 너.
그와 헤어지고 나는 마음이 헛헛해졌다.
그래서 무척이나 허전하고 허무하고 외로웠고 때론 담담했다. 매주 금, 토, 일은 소개팅이란 명목으로 남자를 의무처럼 만났다. 서른 중반에 이렇게 멋진 남자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고, 그와는 인연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쌀쌀한 가을 밤바람이 드라이한 머리를 매정하게 헝클어뜨리고 지나가고 있을 때, 만나기로 한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 파란 코트 입은 분이죠? 바로 앞에 있어요. 타세요.
날렵한 은색 BMW가 코 앞에 서 있었다.
바람이 차문을 닫은 건지 내가 닫은 건지 헷갈릴 정도로 떠밀리듯 차문을 닫고 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두운 조명하래 하얀 이가 반짝 거렸다. 잘 생겼구나. 부담스럽게, 엄청 멋지게, 남자답게...
마음에 한 줄기 낙관이 뻗었다 묻혔다. 우리는 으레 어른들이 마련한 자리에서 먹을 법한 비싼 음식을 먹었고, 예의를 지켰고, 서로의 공통점이 있는지 신중하게 탐색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탐색의 시간은 그의 집 앞 배웅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헤어진 그에게서 연락이 올까? 이 남자는 연락을 할까?
남자가 흩어놓고 간 잔상 끝을 잡고 자연스럽게
그가 떠올랐다. 그의 꾸미지 않던 미소와 매번 집앞까지 바래다 주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막차를 타기 위해 열심히 뛰어 가던 그의 등을 몰래 아파트 비상구 계단 창을 통해봤던 나. 그가 나에게 한 줌 주고 떠난 것은 그동안 잊었던 순수와 조건없이 설레는 열정이었나. 나는 이제 정리가 되었기에 주춤거리며 이별을 선택했던 그를 담담히 떠올릴 수 있었나...
집까지 걸으며 바짝 마른 체 나뒹구는 낙엽을 함부로 발로 차며, 내 마음의 쓸쓸함을 모조리 걷어 내고 싶은 밤이었다. 담담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이유없이 두근거리기도 하는 밤이었다.
그에게도, 그 남자에게도 연락이 왔다.
하지만 쓸쓸함은 남았다.
나는 또 한동안 매번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매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를 잡지도 어떤 확신을 주지도 않고 망설이던 그를 떠올렸다. 그것이 이별 정리방법이었다.
나는 그 누구와 살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 사람과 부딪히며 매만지며 그렇게 반짝반짝 윤이 나는 삶을 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오랜 출장 끝에 돌아오자마자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우리집 현관에 서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나는 무너졌다.
객관적 기준으로 봤을 때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
선택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던 너란 남자는 나를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
결혼할 준비가 아직 안 됐다며 늘어 놓는 이유들은 그저 변명이야.
우리집에 인사오기로 한 날, 아프다며 약속을 취소 한 것은 나를 기만한 행동이야.
그래서 결론은 너는 나를 그만큼 사랑한 것이 아니었어.
수없이 읊조렸던 결론들이 사락, 소리도 미쳐 내지 못하고 사라졌다. 눈물이 먼저 흘러 그가 이그러졌다. 우리가 이별했었던 이유들도 녹아 사라졌다.
그는 그 사이 돈을 모았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늘 더 고민하고 망설였던 그는 나와 살 집을 혼자 힘으로 마련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너만 있으면 된다던 나에게 고생 시키기도 싫고, 아무 것도 없이 시집 오라할 수 없다는 말이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는 걸 안 그는.. 우리가 헤어진 시간 동안 수도권 전세금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한참 불안한듯 내 눈치를 보면서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하고 말을 꺼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현실을 알아버린 남자, 그렇지만 늘 꿈을 꾸듯 순수한 남자. 나는 결코 꽃 같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지만 무작위로 핀 들꽃같은 느낌을 주는 그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재능은 숨은 보물찾기를 잘 한다는 것이었다. 꼭 꼭 숨겨진 종잇조각, 누군가 흘린 조잡한 장난감이나 동전, 누군가 숨기려한 찰라의 감정, 친구의 따뜻한 마음 같이 숨겨진 보물들은 유난히도 내 눈에 쏙쏙 잘 들어 왔었다.
나는 보물을 찾은 것이다.
내가 이 보물과 함께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닐 수도,
어쩌면 모험이고 힘든 길일 수도 있다는
조언들은 그냥 인생에 있을 수 있는 보편적 일상으로 흔적을 남길 뿐이었다.
겁장이는 겁을 상실하고 이렇게 말했다.
- 그래서 뭐? 그런게 인생인거라고 다들 말 하는 거 잖아? 보물의 진가는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