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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림 Mar 09. 2022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요즘 전시: 러시아 혁명예술 전



오랜만에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정비하기 위해 예술 작품을 감상합니다.

납기와 예산 범위 내 효율적인 투자, 그에 따른 아웃풋, 매출실적, 담당 상품의 인지도 등 감성을 무디게 하는 직장인을 둘러싼 업무 현황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한 주였습니다.

오늘은 20대 대통령 선거날. 오전에 투표를 마치고, 밀린 잠을 자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며칠 전 인스타그램 홍보를 통해 알게 된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시를 보러 갑니다.


미술관이 있는 곳은 광장 근처입니다. 그곳은 몇 년 전에 사람들이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여 촛불을 들었던 곳이고, 늘 다양한 목소리로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회적인 불합리와 부조리를 얘기하고, 자기의 이해관계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지금 그곳은 공사 중입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광장이 아니라 그 옆 미술관입니다.


100여 년 전 특정 예술의 형식과 내용만을 고상한 예술의 범주에 넣고, 특권의식을 누리는 예술계에 경종을 울리고 기존의 질서를 비틀고, 대항하며 새로운 대안으로써 원근감, 사실주의적 형태, 회화적 요소들을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화풍을 만들어낸 추상주의 화가들, 러시아 혁명 예술 작품을 만나기 위해. (이번 전시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러시아 정치적 상황과는 무관하며, 화가들은 현재로 치면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 출신이나 주변국 출신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따라 러시아 혁명 예술이라고 명명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TMI입니다만)



선명한 붉은색의 메시지들. 자기 예술의 방향성을 전하는 예술가들의 성이 들리는 거 같습니다. 아방가르드(전위적, 전장의 1열 선봉대를 지칭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 소리의 선명성이 이제는 유순하게 접어둔 반골기질을 깨우는 것만 같습니다.  





정확한 전시의 명칭은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 혁명의 예술 전'입니다. 전시 테마의 가장 앞에 선 칸딘스키는 고등학교 시절 미술책에서 먼저 접했습니다. 20세기 러시아 추상화의 대가이지요. 법조인 가문의 자제로 그 자신도 법학 교수로 법조계에 몸담고 있다가 30대 중반의 나이에 화가로 전향합니다. 화가로서도 대성공을 거두어 오늘날 러시아는 물론, 유럽, 그리고 아시아권의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같은 추상화가 사조로 몬드리안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몬드리안은 회화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사진이 아닌 미술이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을 빨강, 파랑, 노랑 사각형을 검은 선으로 구획 짓는 구성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사진 기술이 일반에 소개되던 시대로 몬드리안은 회화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고자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향은 사물의 형태나 회화성을 덜어내는 것에서 해답을 찾았습니다. 회화성이 철저히 배제된 몬드리안의 그림은 '차가운 추상'으로 분류되었고, 칸딘스키는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좀 더 자유롭게 구성하여 담은 즉흥 시리즈가 유명하며, 쉽게 얘기하자면 몬드리안 보다는 사물의 형태나 회화성이 엿보여  '뜨거운 추상'으로 분류됩니다.

   

좌) 몬드리안 :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 우) 칸딘스키: 즉흥 No.217_회색타원

[더보기]

http://naver.me/x6PAwHRe

http://naver.me/xE16hFLN



고등학교 때 입시공부하면서 열심히 암기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니라, 관람 가기 전에 블로그 글들과 유튜브 영상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바람 쐬듯 가볍게 눈요기로 보는 전시도 좋아하지만 가끔은 과외 시간을 들여 작품의 제작 연대기, 해석, 재해석, 논란, 작가의 일대기 등을 찾아가며 보는 전시도 유용합니다. 당장 무엇에 쓰기 위한 지식은 아니지만 녹슨 감성을 갈고닦는 소소한 공부는 그 자체로 삶의 활력을 부여해주고 오래 기억하여 언제가 꺼내어 놓을 수 있게 합니다.


공부하는 전시라는 면에서 이번 전시는 오디오 가이드가 있어 작품을 알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화배우 이제훈씨가 작품 해설에 참여하였습니다. 중저음의 낮은 음색, 또박또박 정직한 딕션, 물 흐르듯 편안한 호흡이 예술작품 오디오 가이드와 잘 어울립니다. 미술관 입구에서 오디오 가이드 앱 다운로드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오디오 기기도 대여해줍니다만, 본인의 블루투스 무선 이어폰이 있다면 굳이 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디오 가이드 앱 다운로드에 3,000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는데, 만약 둘이 전시를 본다면, 한 명만 결제를 하고 무선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들을 수 있습니다. 무선 이어폰을 지참했다는 전제하에요. 일행과 보조를 맞춰 작품을 전시하면서 상대의 감상 속도를 배려하는 긴장감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붉은 방을 가득 채운 1910~20년대 활발한 활동을 한 러시안 추상 화가의 작품들입니다.

붉은색은 감각적으로는 뜨거움을, 상징적으로 열정을, 비유적으로 피를 연상시킵니다. 정치적으로는 이전 세기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번 세기에는 권력의 일인자, 국내 정치에서는 현재 대표 야당(당장 오늘 개표 결과에 따라 여야가 바뀔 수도 있겠군요. 저의 정치적 성향, 희망과는 무관합니다만)의 컬러입니다. 이번 전시의 테마 컬러이기도 합니다. 전시회 티켓, 포스터, 전시 월, 글자색 어디서든 붉은 컬러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감성을 강렬하게 환기시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올려 둔 그림들의 존재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 프세볼로트 울리야노프-붉은 말들, )나탈리야 곤차로바-추수꾼들



가장 먼저 관람객을 반겨주는 것은 프세볼로트 울리야노프의 붉은 말들입니다.  구름 위를 달려가는 말들의 기세, 생동감이 땅이 울리는 듯한 현장감을 선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좋았던 점은 20세기 초 사회주의 혁명 시기 러시아 여성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저는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올가 로자노바의 작품들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탈리아 곤차로바는 서유럽의 야수주의,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표현주의인 신원시주의 화풍을 이끌었습니다. 러시아의 민속화나 이콘화 등에서 원시적 색감을 찾고 예술적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합니다. 형태의 굵은 외곽선, 선명한 색감, 단순화지만 회화성 풍부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고갱이 떠오르는데, 추수꾼을 그린 그림에는 혁명시기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등 좀 더 사회적 주제의식이 선명합니다. 무대미술과 무대의상 디자인도 했다니 넘사벽 재능입니다.


http://naver.me/FXHckpRg




올가 로자노바의 그림은 특히 좋았습니다. 올가는 스승인 말레비치와 함께 러시아 절대주의를 창시한 신세대 화가인데 32살의 젊은 나이에 감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구상적 구성 연작이라고 불리는 그녀의 작품은 기본적인 절대주의 구성 요소들(점, 선, 면)을 체계적으로 배치하여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색상과 형태를 나타내도록 만든 작품입니다.

(오디오 가이드 해설 중)


블랙, 파랑, 노랑, 흰색의 면들과 기하학적 무늬가 서로 강렬하게 영감을 주고받고 소통하는 느낌이 듭니다. 번개가 치는 듯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우측 상단의 검은 기하학 도형들은 달리는 말 또는 연장을 연상시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한 운동성을 느끼며, 미디어 아트에도 많은 영감을 줄 법한 작품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지 않았지만 블로거 '아트메신저 빅쏘'님의 글에 더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어 링크를 공유합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bigsso&logNo=222327131988&proxyReferer=https:%2F%2Fm.search.naver.com%2Fsearch.naver%3Fquery%3D%25EC%2598%25AC%25EA%25B0%2580%2B%25EB%25A1%259C%25EC%259E%2590%25EB%2585%25B8%25EB%25B0%2594%26where%3Dm%26sm%3Dmob_hty.idx%26qdt%3D1



6개의 소주제, 총 75점 전시작 중 이번 전시의 오디오 가이드는 31개입니다. 착실히 따라 감상하면 대략적인 러시아 아방가르드 그룹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은 스탈린 집권 이후, 퇴폐 미술로 낙인찍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나마 칸딘스키가 독일 정착하여 바우하우스 교수로 지내며 작품활동과 후학 양성으로 명백을 이어간 정도가 아방가르드 그룹 일원의 활동으로 전부였다고 합니다. 이후 이들의 미술은 20세기 현대 미술, 건축, 디자인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고 50년 뒤, 미니멀아트로 부활합니다. 특히 저는 말레비치와 올가 로자노바의 절대주의 작품을 보며 현재 인테리어 트렌드인 '미드센추리', '미니멀', '모던'에서 그들의 DNA를 느꼈습니다.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리려 했던 그들이 그야말로 현재 대중의 취향을 저격한 것은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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