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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림 Aug 07. 2022

마지막 볼링핀

직딩 속마음 일기

딱! 스트라이크! 와그르르르. 

공이 핀을 때리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맞았다. 제대로 맞았어!’

물리의 법칙 대로 기울어진 레인을 따라 가속이 붙어 나아가던 볼링공이 장애물이자 목표물인 10개의 핀을 때렸을 때의 타격감, 제대로 맞은 느낌. 됐다. 다 넘어갔어. 쓰러지는 볼링핀들을 뒤로 하며, 마침내 스코어를 올리고 팀에 기여했다는 성취감과 뿌듯함이 밀려온다. 이 기세를 몰아 세레모니?

‘와아, 아깝다.’

동료들이 아쉬워한다. 어, 반응이 이게 아닌데. 휙, 등을 돌려 핀덱을 바라보니, 키 38.1cm, 몸무게 1.6kg, 우측 가장자리 안쪽에 오도카니 서 있는 10번 핀과 눈이 마주친다. 


[이미지 출처: Pays de Saint Jean de Monts ]


눈이 없는 핀과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눈 앞이 잠깐 흐려진다. 며칠 전 팀장과 면담이 있었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그런 말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

“톰슨가젤님도 연식이 좀 되었잖아요. 회사를 천 년, 만 년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팀장인 저도 마찬가지고요. 모두에게 마지막 순간은 있는 거 같아요. 아 지금 선화님이 그 마지막이라는 얘기는 아니구요.”

그렇다면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성대를 다친 사람처럼 나는 소리내어 말하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 대화는 어떻게 흘러갈까? 직구일까? 변화구일까?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냐 물으려다 조금 더 들어 보기로 한다.

“솔직히 우리 모두 지금 위치에 안주하기 보다는 다음 단계를 고민해야 할 때고 확실한 성과로 어필을 해야 하잖아요. … … 지켜보고 있으니 더 노력해주세요. 더 자신의 역량을 어필해주세요. 넥스트 팀장 감인지 아닌지 윗분들과 동료들이 다 평가하고 있어요.’ 


아, 난 또 뭐라고. 김빠진 맥주처럼 팀장과의 면담이 시시해졌다. 형식적인 매너로 포장한 면담의 목적은 결국 ‘협박’인 셈이다. 더욱 열정적으로 몰입하여 성과를 보여 달라는 것! 

매년 성과 시즌이 되면 통과의례처럼 상사와 면담을 한다. 상사 스타일에 따라 표현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결국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일관된다. 노동생산성을 더욱 높여 달라는 것. 있는 그대로 얘기를 하자면 ‘당신은 고비용 인력이에요. 그만큼의 생산성을 기대해요. 회사에 더 큰 돈을 벌어주세요.’인 셈이다. 영리 기업에서 인사고과의 핵심은 결국 노동생산성이다. 역할 상승과 연봉 협상이라는 ‘당근’이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최근 몇 년 간의 업황과 ‘대거 퇴사, 소폭 입사’한 회사의 인사동향을 종합해 보았을 때 ‘회사가 당신의 성장을 지지한다’는 말은 ‘트럼프가 히스패닉 인권을 지지한다’는 말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얘기다. 입 맛이 쓰고 어깨가 쳐진다.  


다시 레인 끝, 핀덱 위에 서 있는 10번 볼링핀의 실루엣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 온다. 있는 힘껏 밀쳤는데 밀리지 않고 남아 있는 10번이 아직은 아니라며 버티고 있는 나 자신인 것만 같다.

‘안 던지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동료 하나가 어깨에 손을 얹는다. 손 끝을 타고 흐르는 사람의 온기가 따뜻하다.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볼링공을 던지기 위해 뒤로 물러 났다. 맥없이 던진 두번째 볼은 고랑을 타고 흘렀다. 동료들이 박수를 친다. ‘괜찮아, 괜찮아!’ 

볼링은 10개의 볼링핀을 모두 쓰러뜨려야 높은 점수가 나는 게임이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점수에 연연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볼링핀 입장에서는 밀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두 번째 볼이 와서 클리어하겠지. 그렇게 나의 세트가 끝나고 다음 사람을 위해 다시 10개의 볼링핀이 역삼각형으로 배열된다. 나도 그만 어프로치에서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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