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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대리 Sep 17. 2023

은행원은 내 친구

 요즘 객장에서 고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뭘까? 바로 "내 돈 내가 찾겠다는데 뭐가 이렇게 복잡해요?"이다. 혹시 일천만 원 이상의 현금을 창구에서 찾아본 적이 있는가? 요즘은 그만큼의 현금만 가져가도 사용처를 직원들이 꼬치꼬치 캐묻는다. 고액 현금을 인출할 경우 경찰에 신고하는 은행도 있다. 경찰이 묻는 질문에 고객이 이것저것 대답한 후에야 돈을 다. 고객들은 내가 내 통장에서 내 돈을 찾겠다는데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급기야 민원으로 번지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까지 까다롭게 하는 이유는 보이스피싱 피해 예방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가 뭐든 간에 짜증 나는 것은 사실일 테다. 어찌 됐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내 돈을 찾겠다는 것 아닌가.


 무더위가 지나고 날씨가 선선해질 무렵. 그날도 붐비는 고객들로 객장은 부산스러웠다. 고객이 많아 정신이 없을 때는 더더욱 조심해서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대기 고객이 많다고 고객의 업무를 빨리빨리 처리하다가는 실수하기 십상이다.

 "160번  고객님"

 "저 돈 좀 찾으러 왔어요."

 "아~네. 얼마 찾으세요?"

" 천오백만 원이요."

 아 이런. 천 오백이라니. 어디다가 쓸 것인지도 물어야 하고, 우리 지점은 경찰에 신고까지 해야 한다. 어르신들이 주고객층이라 출금액이 오백만 원만 넘어가도 신고가 필수다.

 "아...... 네 알겠습니다. 고객님 일 처리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요즘 하도 보이스 피싱이 많아서요. 혹시 수표로 찾아가시는 건 안될까요?"

 수표는 발행처나 지급처가 모두 기록에 남기 때문에 그나마 안전하다.

 "그런 거 아녜요. 그냥 제가 어디 쓸 데가 좀 있어서 그래요. 현금으로 줘요. 그만 물어보고 빨리 좀 해줘요. 바쁘니까!"

 하아. 이 고객. 힘들 것 같은 느낌이다. 재촉하는 것을 보니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경찰도 와야 하는데 그동안 시간도 걸릴 터. 길게 시간을 끌었다가는 화낼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난 시간을 단축하고자 우선 경찰에 전화부터 해서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그때까지 시간을 끄는 동시에 사용처를 알아내는 것.

 "네 알겠습니다. 고객님 제가 빨리 처리해 드릴게요. 이게 요즘 하도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요."

 "아니 내가 무슨 할머니도 아니고! 그런 거 안 당해요. 날 뭘로 보는 거예요? 그리고 돈 맡길 때는 별 말 없더니 갑자기 찾는다니까 왜 이래요? 짜증 나게? 내 돈 내가 찾겠다는데? 어제 요 앞에 은행에서는 잘도 주더만 여긴 왜 이래요?"

 진짜 이럴 때는 그냥 돈 주고서 보내고 싶다. 나 좋자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꾹 참고 다시 말했다.

 "맞아요. 엄청 귀찮으시죠? 정말 죄송합니다. 내 돈을 내가 찾는 데 이게 무슨 일이래요? 저희도 내부적으로만 그냥 예방 차원에서 하는 거니까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고객님. 휴대폰에 악성 프로그램 깔린 게 있나 확인만 해볼게요. 그러 나서 인출 도와드리겠습니다."

 일단 핸드폰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고객으로부터 핸드폰을 받아 확인해 봤더니. 이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악성 프로그램이 깔려있었다. 서둘러 통화 내역을 봤다. 모르는 번호의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연락한 기록도 있었다.

 "고객님, 실례지만 최근에 연락한 이 사람은 누구예요?"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거 제가 쓸 거 아니고, 언니 줄 돈이에요."

 "언니요? 그럼 계좌로 언니한테 이체해 주시면 되잖아요."

 "아니 현금으로 언니가 필요하대요. 아니 근데 제가 누구랑 연락하는지도 알려줘야 해요?"


 잠시 후, 언니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아 왜 이렇게 안 나와! 시간도 없는데!"

 "고객님! 이 분이 고객님한테 돈을 드려야 한다는데 고객님 본인 계좌는 없으신가요? 현금대신 제가 계좌로 보내드릴게요."

 "아 그거 제가 어디 보낼 데가 있어서 그래요. 그냥 빨리 좀 빼주세요."

 "아니 그럼 그 보내야 하는 계좌를 알려주세요. 그리로 바로 돈을 이체하시면 되잖아요. 뭐 하러 두 번이나 거쳐서 보내세요."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제가 카드론이 있는데 그게 이자가 너무 세서 다른 일반 대출로 갈아타려고 그래요. 그래서 일단 카드론부터 갚고 갈아타려고 돈을 보내는 거예요."

 하. 드디어 진실이 나왔다. 전형적인 대환대출 사기다.

 "고객님 그럼 지금 바로 카드론을 갚으셔야지 현금은 왜 찾아가세요? 그리고 누가 대출상환을 현금으로만 받아요."

 "아니 그 직원이 원래 안되는데 현금 가져오면 해준다고 그랬어요. 말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여기 봐봐요."

 고객이 보여준 것은 채팅 내용이었다. 모 은행 직원이라는 그 사람은 고객에게만 특별히 해주는 것이라며, 기존 카드론 상환을 위해 일단 돈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했다. 그러면 자신이 그 돈으로 카드론을 갚고 다른 저이자 대출로 갈아타게 해 준다는 것이다. 본인의 명함까지 사진으로 보냈는데,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고객님. 이거 사기예요. 이거 대환대출 사기라고요. 은행 직원이 무슨 이런 식으로 대출을 대신 갚아줘요."


 그러나. 아무리 얘기를 해도 고객은 믿지 않았다. 몇 시까지 만나기로 했고 시간 맞춰 가야 하니 돈을 빨리 달라고 했다. 본인과 채팅한 사람은 진짜 직원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꾀어놨길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지금 직접 대면하고 있는 나보다, 자주 보는 은행 직원보다 믿는 것일까.

 때마침 경찰이 도착했다. 나는 경찰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했고 고객은 경찰과 면담의 시간을 가졌다. 경찰과 한참을 얘기하던 고객.

 "어떡해! 어떡해! 나 진짜인 줄 알았어. 나 어제 준 천만 원은 어떡하지? 이거 어떻게 해야 해?"

 고객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 인지하는 듯했다.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어제 아무 말 없이 돈을 줬다던 그 은행에서 천만 원을 인출해 이미 돈을 한 차례 보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추가로 돈을 인출해 보내려 했던 것이다. 나는 고객의 통장에서 삼십만 원만 인출했다. 오만 원 권 세 덩이(천오백만 원) 대신 천 원권 세 덩이(삼십만 원)를 봉투에 넣어서 줬다.

 "고객님, 이거 가져가세요. 이따 그 사람 만난다면서요. 봉투가 겉보기에는 비슷해요. 이거 들고 늦지 않게 어서 가세요. 범인 잡아야죠!"

 그렇게 고객은 범인과의 약속 장소에 돈 봉투를 들고나갔다. 이른바 합동 작전이 펼쳐진 것이다. 고객을 몰래 따라간 경찰은 현장을 들이닥쳤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일하는 중에 인출책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윗 선까지는 잡을 수 없었고, 이미 줘버린 돈, 천만 원 이미 줘버린 뒤라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쨌든 인출책을 검거하기도 했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프닝은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났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은행원들이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금방이라도 민원으로 번질 것 같이 화내는 고객도 달래야 하고, 고객 말마따나 본인 돈을 찾는 것인데도 목적을 구체적으로 물어야 하며, 경찰도 아닌데 수사 아닌 수사를 하고 있어야 한다. 진짜 순수하게 개인적인 목적이 있어서 돈을 인출하는 고객에게 욕먹는 것도 다반사.

 그런데 어떻게 하겠나. 범죄를 당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냥 돈을 인출하러 온 사람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으니 말이다. 렇게 범죄에 연루될 뻔한 고객을 도와줘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듣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그래도 은행원은 백 명을 의심해서라도 한 명의 고객 돈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그러니 돈을 이체하거나 인출할 때 은행원이 사유를 꼬치꼬치 묻더라도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자. 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사칭한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있을 때 은행원들이 붙잡고 도와주고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고맙다는 말, 음료수 한 잔은 바라지 않는다. 그냥 업무 처리할 때 이것저것 묻는 게 다소 부담스럽더라도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줬음 한다.

은행원은 고객의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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