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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케터 강센느 Dec 07. 2016

차가워서 따듯하게 채워지는 겨울

1995년 영화 <러브레터>를 21년이 지나서야 열어보게 된 감상

그런 작품이 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너무 유명해서 매스컴에 많이 노출되다 보니 왠지 나도 봤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21년 전에 개봉한 영화 <러브레터>는 아마 많은 이들에게 그런 작품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전 국민이 아는 "오겡끼데스까"라는 명대사는 여러 매체에서 다뤄지면서 본디 지녔던 감성을 점차 잃어갔다. 내가 이 대사를 처음 접한 것은 개그 프로그램에서 한 개그맨이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을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면서였는데 그 장면이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20년 가까이 긴 세월이 지나도록 이 영화를 이미 봤다는 착각 속에, 아니 그보다 이 영화는 그저 "잘 지내냐"고 묻는 것이 전부인 영화라는 속단 속에 살아왔다.



그런데 며칠 전, 눈이 소복하게 쌓인 풍경을 출처 모를 잔상으로 스쳐보게 된 저녁에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과 혁오의 <공드리> MV를 본능적으로 꺼내보게 됐고 그 끝에 <러브레터>까지 마음이 닿게 됐다. 유난스럽게 설경에 집착했던 그날 밤 내가 그 영화를, 그 편지를 21년 만에 꺼내 읽게 된 것은 소녀 이츠키가 잃어버렸던 시간을 찾게 된 과정과 어렴풋한 유사성을 띠며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동명의 소년과 소녀, 그리고 비슷한 얼굴을 가진 2명의 여성. 그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얼개를 중심축으로 전개되는 모든 플롯은 첫사랑에게 쓰는 러브레터처럼 서툴고 풋풋하게 그려진다. 특히 소녀 이츠키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영화에 기대했던 설경들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게 사랑이었음을 깨달았을 때의 감정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몇 차례의 겨울을 견디고 나서야 비로소 무언가 잃어버렸었단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여백은 무슨 단어로 담아낼 수 있을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소년이 소녀에게 건넨 마지막 책의 제목이라는 점은 분명 이런 물음에 대한 애틋한 답변이었으리라. 


단순히 "오겡끼데스까"라는 물음으로 모든 이야기가 귀결될 것이라 생각했던 이 영화는 생각보다 더 복잡한 이야기와 감정들을 다루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수신자에게 전달된 러브레터, 수신을 기대하지 않고 보냈으나 수신된 러브레터. 그 신기한 러브레터들 속에서 나오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은 설경에 눈을 돌릴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감정선을 만들어낸다.

 


순백의 도화지 같은 설경에 볕이 스밀 즈음, 묵혀뒀던 얼음 같은 설움이 더운 눈물이 되어 눈밭 위를 적신다. 소녀 이츠키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여백을 채웠듯 히로코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여백을 채워야 했다. 2년 전, 그녀가 사랑했던 연인 이츠키를 죽음으로 몰았던 설산의 여명을 보며 절규에 가까운 안부인사를 건네는 그녀는 잘 지내냐는 인사와 함께 기나긴 러브레터의 마침표를 찍는다.


"오겡끼데스까"라는 말이 언제 나올까 기다리던 마음이 누그러진 지 한참 지나서야 그 대사를 마주하게 된 나는 그 대사의 본질적인 감성을 오롯이 느끼며 곱씹어보게 됐다. 안부와 작별을 중의적으로 담은 여섯 음절의 음성이 설산의 여명 뒤로 흩어졌다가 이내 나에게로 메아리쳤다. 아득한 그리움으로 뜨겁게 데워졌다가 설산의 눈발에 차갑게 식혀지기를 반복하며 히로코가 쓴 러브레터의 마침표는 담금질을 거친 쇳덩이처럼 단단한 성질을 지니게 됐다.



러브레터는 어쩌면 요즘 세대에게 구시대적인 물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으로 초 단위의 안부를 묻는 요즘인지라 며칠 간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편지를 기다리는 그 감정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이런 애틋한 이야기가 그려질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도 생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러브레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에 러브레터를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다. 차갑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따듯한 이야기가 채워지는 겨울, 영화 <러브레터>는 겨울을 가장 따듯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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