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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케터 강센느 Jul 31. 2017

덩케르크에서의 106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천재성에 다시금 놀란 감상평 

출처 모를 총성과 함께 주변의 동료들이 하나둘 쓰러져간다. 왠지 무기력해 보이는 병사는 죽기 살기로 도망쳐서 담을 넘고 아군의 방어선에 도착한다. 방어선 너머, 연합군 수십만 명이 운집한 해변. 그곳이 바로 덩케르크다. 총으로 무장했으나 무기력과 공포에 압도되어버린 그들의 대열 속으로 주인공과 함께 관객은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된다.



#1. 덩케르크에 놓여진 병사1, 병사2, 병사3...


전쟁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카타르시스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지만 개중에 가장 큰 것은 단연 '안도감'일 것이다. 살면서 절대 경험하기 싫은 극도의 환경과 사건을 스크린 너머로 마주했을 때, 관객은 착석한 자리의 팔걸이를 매만지며 단지 그것이 스크린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며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러한 관객의 심리를 철저하게 봉쇄해버린다. 10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동안 BGM이 멈추는 순간은 단 두 번. 그 시간을 분으로 환산하면 1분이 채 되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총성과 함께 주인공이 살기 위해 내뛰는 순간부터 시작된 BGM은 영화가 엔딩에 치닿을 때까지 계속해서 진행된다. 각 씬에 따라서 다양한 변주가 첨가되지만 요는 베이스로 옅게 깔리는 초침 소리에 있다. 인간의 긴장감을 극도로 이끌어내는 초침 소리가 화이트 노이즈처럼 관객이 인지하기 힘든 수준으로 러닝 타임 내내 깔리는데 이것이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아닌 덩케르크에 떨어진 '아무개 병사' 중 한 명이 되도록 만든다.


긴장-완화 곡선을 얼마나 촘촘하게 잘 만들어내느냐가 영화 흥행의 성공 요인 중 하나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잣대인 것이고. 영화 <덩케르크>에서는 덩케르크에 놓여진 병사가 느꼈을 넌더리 나는 긴장감의 연속을 관객이 동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러닝타임 전반을 관통하는 BGM을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이한 연출을 통해 <덩케르크>는 기존 전쟁영화들이 보여줬던 캐릭터 중심의 플롯(plot)이 아닌, 사건으로의 몰입을 유도하는 스토리(story)적 전쟁영화로서 새로운 성취를 달성하였다.



#2. 해변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하루, 하늘에서의 한 시간


러닝타임 내내 지속되는 BGM 외에도 이 영화의 특이한 연출적 구성이 또 있는데 동일한 사건을 경험하는 육해공의 시간을 '상대성'과 함께 보여줬다는 것이다.


절대적 시간은 인간이 정해놓은 단위로 정량적 환산이 가능하지만 개개인이 경험한 '심리적 시간'은 환산이 불가하다. 세계 2차 대전 때 일어났던 덩케르크 사건의 공간적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일정 부분 가능한 일이나 당시의 시간적 경험을 '심리적 시간'으로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놀란 감독은 아주 영리한 방법으로 이러한 한계점을 해결해냈는데 해변에서 육군이 탈출을 시도한 일주일, 바다에서 어부가 덩케르크로 향하는 하루, 하늘에서 공군이 적군기와 사투를 벌인 한 시간을 '심리적 시간'의 동일 선상에 나열함으로써 <덩케르크>의 절대적 시간을 무너뜨렸고, 더 나아가 관객이 영화관에서 경험하는 106분의 러닝타임까지 자연스럽게 함께 놓여지게 했다. 이러한 기법을 통해 관객은 더욱더 관객이 아닌 '병사1, 병사2'로서 덩케르크 현장에 놓여지게 된다.



#3. 보이지 않는 적이 가장 두렵다. 


나는 감히, 이 영화가 전쟁영화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그었다고 단언하는데 앞서 말했던 다양한 이유가 이러한 주장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면 그와는 별개로 또 눈여겨볼 만한 특이점이 있어서 이에 대한 얘기로 감상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전쟁은 '아군vs적군'이라는 프레임을 기본으로 진행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덩케르크>에서는 적군의 얼굴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덩케르크 사건이 전투보다는 후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지만 이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놀랍다.


공중에서 투하된 폭탄, 수중에서 날아온 어뢰, 동료들의 가슴팍에 박히는 총알은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공포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러한 연출로 인해 '아군vs적군'이 아닌 '도망자vs추격자'로 <덩케르크>의 프레임은 철저히 전환된다. 그리고 이 프레임은 총으로 무장한 40만 대군이 그 어느 군대보다 무기력해 보일 수 있도록 당위성을 부여함으로써 도망자로서 개개인이 느끼게 되는 긴장감을 무너뜨리지 않는데 일조한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화면 밖의 전투기 소리에 40만 명 중 단 한명도 총을 갈겨대지 않고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모습은 덩케르크에 놓여진 그들이 40만 대군이 아닌 도망자 1, 도망자 2로서 각자도생하고 있음을 확연히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전투기에 지상군이 총을 갈겨댄다고 큰 효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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