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리모델링 : 브랜드 같은 집 만들기
신혼집으로 장만한 집은 10년이 넘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낡은 집이었다. 벽지는 원래의 색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변색됐고, 바닥이나 마감 여기저기 일어난 부분들이 많았다. 거기서 끝이랴, 옛날집의 증거로 불리는 체리몰딩도 기본옵션이었다.
우리는 당연히 리모델링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10년 넘은 집을 리모델링하는 일은 단순히 디자인만 요즘스럽게 바꾸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리모델링 방향성을 잡기 위해서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리모델링을 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일은 집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 세계 70억 인구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듯 집도 제각각 다른 특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같은 건물에 같은 구조로 나온 집이라고 해도 층수가 달라지면 집에 들어오는 채광의 느낌이나 풍경의 차이로 인해 분위기가 완전 다른 집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앞서 내가 지향하는 집을 '브랜드'에 빗대어서 얘기한 바 있는데, 이어서 설명하자면 집을 리모델링하는 일은 브랜드를 리브랜딩(rebranding) 하는 것과 비슷하다.
리브랜딩이라는 것은 탄생한 지 오래된 브랜드가 정체성이 모호해지거나 낡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 이미지를 새롭게 개선하고 싶을 때 진행하는 일을 의미한다. 리브랜딩이 진행됐을 때 보통 소비자가 크게 체감하는 부분은 로고의 변화인데 아래의 에어비엔비 로고 변천사만 살펴봐도 그 변화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리브랜딩을 진행할 때 담당자가 꼭 선행해야하는 작업이 있는데, 바로 기존의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서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다.
브랜드라는 것은 시장에 출시된 이후로 수많은 고객과 만나면서 다양한 이미지를 축적하게 되고, 그것이 브랜드가 지향하는 방향이든 아니든 소비자는 그 이미지를 기대하며 브랜드를 소비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기존의 이미지를 무시한 채 소비자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이미지의 리브랜딩을 하면 원래의 고객들이 모두 등을 돌리는 절망적인 상황에 이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상황이다.
요즘 힙한 게 유행이라고 해서 샤넬이 힙한 디자인의 브랜드로 리브랜딩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기존의 소비자들은 대부분 떠나갈 것이다.
샤넬의 핵심 이미지는 힙한 것이 아니라 희소성, 럭셔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샤넬의 핵심 이미지를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리브랜딩이 진행된다면 아마도 희소성, 럭셔리를 더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디벨롭이 될 것이다. (럭셔리한 힙으로 희소성을 살릴 수도 있다)
집도 마찬가지다. 집을 이해하지 않은 채 리모델링을 진행하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집'이 탄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집을 이해할 수 있을까?
집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집의 여러 이미지를 포착하는 일이다. 채광은 시간대에 따라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창문을 1개, 2개, 3개 열었을 때 바람의 흐름이나 정도는 어떻게 되는지, 창밖의 뷰는 어디가 가장 좋은지 등 세밀하게 집을 관찰하다 보면 각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그 공간들을 어떻게 써야 좋을지가 명확해진다.
나의 경우 집을 오랜 시간 관찰한 끝에 다음과 같은 여러 이미지를 포착했고, 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한 리모델링 방향성을 잡았다.
1) 정남향으로 일조량이 풍부하다.
햇빛을 받는 공간은 최대한 햇빛을 오랜 시간 받을 수 있게 살린다.
2) 햇빛과 반대방향에 있는 공간들은 한낮에도 서늘하다.
햇빛을 받지 못하는 다용도실, 작은 방2는 일상생활 공간이 아닌 창고형 공간으로 활용한다. (현재 다용도실은 보조주방, 작은 방2는 드레스룸으로 사용하고 있다)
3) 각 방에 딸려있는 베란다들이 필요 이상으로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리모델링을 통해서 확장한다.
4) 앞뒤로 창문을 열면 맞바람이 불어서 환기가 용이하다.
환기에 필요한 창문은 앞 베란다, 다용도실의 창문뿐이다. 나머지 작은 방들의 창문은 환기를 위해 자주 열고 닫을 필요가 없으므로 필요시, 해당 공간의 창문 쪽에 가구를 배치해서 창을 일정 부분 가려도 무방하다. (앞 베란다, 다용도실 창문은 환기를 위해서 절대 가려선 안된다)
5) 거실의 창과 가까이 있어야 좋은 뷰를 볼 수 있다.
뷰를 즐길 수 있도록 거실의 창과 가까운 위치에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하여 홈카페 겸 식사 공간으로 활용한다.
6) 10년 이상 지난 세월의 흔적이 벽지, 바닥 곳곳에 묻어있다.
리모델링을 통해서 전부 교체한다. (단, 신발장처럼 리폼하여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려서 비용을 절감한다)
7) 집이 좁아 보이게 만드는 요소가 많다. (몰딩, 가벽)
리모델링을 통해서 전부 철거하여 시각적인 개방감을 만든다.
8) 차갑기보다 따뜻한 공간이다.
벽지 곳곳에 이전에 살다 간 사람들의 아이가 남긴 낙서가 있었다. 그리고 창밖으로는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은 굳이 분류하자면 차갑기보다 따뜻한 공간이었다. 이런 심상적 이미지가 추후에 인테리어 소재를 고르는데 많이 작용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리모델링의 큰 방향성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최대한 밝게, 최대한 넓어 보이게
몰딩, 가벽에 의해 시각적으로 답답한 느낌이 있고 각 방마다 딸려있는 베란다를 확장하지 않아서 동일한 23평의 공간 대비 훨씬 좁아 보이는 것이 이 집의 가장 큰 문제로 느껴졌다. 반면에 장점은 집안에서도 선크림을 발라야 할 정도로 집구석구석까지 햇빛이 길게 스며든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햇빛은 최대한으로 받고 공간은 최대한으로 늘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집의 리모델링 방향성이 됐다.
만약, 집을 이해하는 과정 없이 리모델링 방향성을 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실제로, 집을 구하기 전에는 대리석과 골드의 조합으로 인테리어를 하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고 어떤 집에 가든 그것을 실현해야겠다는 고집이 있었다.
근데 대리석과 골드의 조합은 사실 좁은 평수의 집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소재이며, 특히나 우리 집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이미지와는 결이 달랐다.
리모델링을 하는 경우, 많은 사람들이 집의 이미지를 고려하기보다 개인의 취향에 맞춰, 혹은 리모델링 업체가 보여주는 포트폴리오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진행한다. 하지만 이렇게 리모델링하는 것은 샤넬을 힙한 브랜드로 리브랜딩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경우, 보통 트렌드를 따르기 때문에 1~2년 뒤 금방 질릴 가능성이 높다)
리모델링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5년 이상 살아갈 보금자리를 가꾼다는 것을 함의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하며, 더욱 집을 면밀히 이해해야 한다. 집의 이미지를 잘 살린 리모델링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