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1생각 #53
유난히 다른 제품보다 가격이 비싼 브랜드를 마주하면 사람들이 꼭 하는 말이 있다. "야, 저거 다 브랜드값 아니야?" 심화 버전으로는 "야, 저거 애플 로고만 떼면~"이 있다. 이 말에 담긴 함의를 풀이해보자면 가격에 거품이 껴있다는 뜻이다.
나는 마케터로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브랜드값'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정말로 브랜드값은 거품일까?"
세상의 모든 제품은 시장에 등장하기 전에 가격 책정이 이뤄진다. 가격 책정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근거로 반영되는데 제작비, 유통비, 인건비 등의 제반 비용과 시장에 존재하는 경쟁사 제품 혹은 대체재로 사용될만한 상품들의 평균 가격대 그리고 소비자 수요 예측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때 가격 책정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것이 영업이익에 많은 영향을 준다는 정량적인 이유 외에도, 가격에 따라서 브랜드 이미지가 좌우되기도 하는 정성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의류 브랜드가 런칭됐는데 평균적인 가격대가 10만 원 이하로 형성되어 있다면 이 브랜드는 SPA 브랜드와 유사한 이미지로 소비자에게 인지될 것이다. 반면에 100만 원 이상으로 형성되어 있다면 이 브랜드는 명품 브랜드와 유사하게 인지된다. (물론 시장에 첫 진입하는 브랜드가 이렇게 비싼 가격 책정하게 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칼 라거펠트처럼 세계적인 패션 셀럽이 런칭하는 브랜드가 아닌 이상 말이다)
또 다른 예로는 천 원 샵의 1000원이라는 가격 자체가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브랜드는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한다는 브랜드 미션 하에 시장 평균 가격보다 더 저렴한 가격을 책정함으로써 브랜드 이미지를 메이킹하기도 한다. 이처럼 가격은 브랜드 이미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브랜드값은 어떻게 책정되는 것일까?
그 가격이어도 소비자가 구매하는가?
이러나저러나 가격 책정의 핵심은 소비자 수요 예측이다. 브랜드값을 운운하며 욕하는 소비자들이 있어도 다른 한편에서 비싼 값을 주고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있다면 그 브랜드의 가격 책정은 실수가 아니라 '전략적인 판단'일 가능성이 높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 브랜드의 타겟은 욕하는 소비자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수요공급의 법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애플이다. 애플은 항상 브랜드값 논란(?)의 중심에 서는 브랜드인데 아이폰 XS가 출시될 당시 애플 CEO 팀쿡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다.
Q. 신형 아이폰의 가격이 너무 높게 책정됐다는 소비자 불만이 많은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소비자들이 원하는 가격대는 다양합니다. 우리가 책정한 가격은 그들이 지불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팀쿡)
이를 풀이하자면, "비싸도 살 사람은 산다"는 의미였다. 팀쿡이 이렇게 자신감에 넘쳤던 이유는 이전 모델까지 이러한 프리미엄 가격 정책이 꾸준히 시장에서 잘 먹혔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애플의 충성고객들은 브랜드값이 많이 붙은 가격임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애플의 모든 제품을 구매해왔다. (이런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애플 충성고객들을 '앱등이'라고 부르며 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폰 XS가 출시되던 시점에는 중국의 여러 브랜드가 꽤 괜찮은 퀄리티의 저가 스마트폰을 출시하면서 중국의 내수시장을 점유해가던 시점이었고, 마침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보여줬던 애플의 혁신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소비자들의 반응까지 맞물린 탓에 아이폰 XS는 팀쿡의 단언과 달리 예상보다 저조한 판매량으로 실적 부진에 시달렸다.
아이폰 XS의 실적 부진을 의식한 탓일까. 이후에 출시된 아이폰 11은 이전 모델보다 저렴한 가격에 출시됐다. 늘 프리미엄 가격 정책을 유지해오던 애플이 이례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를 브랜드값의 측면에서 해석해보자면 애플의 브랜드값이 떨어진 것이다.
애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브랜드값'은 결국 브랜드가 아니라 소비자가 만드는 것이다. 물건을 구매할 때 물건의 실용성만 생각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물건보다 브랜드가 주는 가치에 중점을 두는 소비자에게 '브랜드값'은 유통비, 제품 원가만큼 합리적인 요소다. 그들은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를 산다. 그리고 그 브랜드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즐긴다. 아래와 같이 말이다.
A는 5년 전에 구매한 파타고니아 후리스를 매년 가을마다 꾸준히 입는다. 그리고 작년에 구매한 프라이탁의 백팩은 외출 시 꼭 챙기는 최애 아이템이다. 그리고 샤워를 할 때는 러쉬의 제품을 사용한다.
위에서 A에 대한 소개는 그가 사용하는 브랜드 3개(파나고니아, 프라이탁, 러쉬)만 언급이 됐지만 이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대충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인지에 대해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이 브랜드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잘 그려지지 않을 수 있다) 풀이하자면, A가 사용하는 브랜드들은 가격이 일반적인 제품들보다 조금씩 높은 가격대지만 친환경 정책을 펼치는 브랜드들이다. 그래서 아마도 A는 환경을 생각하며 가치소비를 즐기는 소비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생각보다 많은 소비자들은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를 구매한다. 그리고 그런 수요에 의해서 '브랜드값'이 책정된다. 그 이유가 친환경이든 럭셔리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아무리 이해가 안 가는 수준의 브랜드값이 붙은 제품이 있다고 할지라도 굳이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불만을 토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브랜드 가치에 맞지 않는 브랜드값을 가진 제품은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에 대한 리스크와 책임은 브랜드가 고스란히 지게 된다.
그래서 소비자는 그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소비 활동으로 각 브랜드의 브랜드값을 매겨주면 그만이다. 브랜드값이 마음에 안 들 땐, 그 제품을 사주지 않는 것만큼 확실한 불만 표출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브랜드값은 결국, 거품이 아니라 소비자의 수요가 반영된 지극히 현실적인 가격요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