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죽은 듯 조용히 지냈던 한 달 여의 시간에 대해서
금요일의 직장인이라면 모두가 그렇듯, 시계가 오후 5시 반을 지나가면 조금 있으면 나는 퇴근을 할 거고 그 때부터 주말이 시작이고 하지만 퇴근을 제 시간에 무사히 하려면 업무보고일지를 작성해야 하고 내 자리의 쓰레기통이 꽉 찼으니 냄새 안 나게 비워야 한다든가 등등 평소보다 다소 바쁘게 하루의 마무리를 한다. 이상하게 그렇다. 금요일만 되면 그렇다. 또 재미있는 것이, 이럴 때 꼭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갑자기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긴다거나 나에게 업무를 전달해줘야 할 누군가가 그 일을 까먹고 이제서야 전달해준다든가. 약간의 짜증이 나긴 하지만 그런대로 쿨하게 넘긴다. 왜냐하면 금요일이니까. 금요일을 대하는 직장인 윤윤당의 자세는 바쁜 와중에 급작스럽게 닥친 일에 대해 짜증이 물론 나지만 그런대로 여유롭게 관대하게 넘긴다. 금요일이니까 괜찮아, 라고.
평화로운 관용의 시간을 보내던 중, 지-잉 하고 폰이 울렸다. 내 시선은 업무 모니터에서 폰으로, 액정에 뜬 알림 메시지로 갔다.
브런치 작가가 됐을 때, 글 쓰는 거 게을리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아주 굳게 마음먹었지만..할말하않-역시 직장인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니, 나도 일을 하느라 쌓인 피로는 풀어야 하니 주말엔 생각을 잘 안 하는 편이고, 평일은 시간이 나지 않으니 말할 것도 없고. 만사가 귀찮았던 거지. 그래, 귀찮음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충신이라고 하자.
아무튼 저 알림을 보고 지난 한 달 동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봤다.
음, 뭔가 많긴 많았다. 많았고, 여전히 많고.
그리고 그것들로 인한 영향도 꽤 컸고, 이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원래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제작 파트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것도 꽤 오랜 시간을 그 분야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을 기획하든 전략을 세우든 '제작했었을 때'의 관점으로 건드리는 것들이 많다. 자료조사로 얻은 수많은 정보들 중 나와 맞는 건 취하고 그렇지 않은 걸 쳐내는 것. 그렇게 해서 추려진 정보를 토대로 뼈대를 세우고 여기에 살을 붙여나가는 행위들. 방송생활 조금이라도 했으면 어딜 가서 무슨 일이든 잘 해낸다고 하더니, 이게 그 뜻이었나보다. 도움 되는 수준이 아니라 이걸로 내가 이루고 싶은 무언가를 실행할 수 있게끔 해주니까. 그래서 그때의 관점으로 시도를 하는 게 참 많다. 문제는, 나의 이러한 관점에 같이 의견을 보태 줄 사람이 없다. 물론, 함께 하자고 본인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고 공감을 표한 사람은 있다. 그런데 그는 과거형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처음에 같이 동의해놓고 이제와서 왜요? 그에게 되묻고 속으로 곱씹어봤지만, 그도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결론은, 지금 이 곳과 나는 맞지 않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곳에서 운영하고 있는 브랜드의 이미지와 방향성에 대해 내가 추구하는 것과 이 운영사의 최고 윗사람이 생각하는 게 어마어마하게 상이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듯, 나는 떠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떠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 많이 무너졌었다. 내가 그렇게 무능력한 사람인가, 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인가, 2017년 이후에 느껴본 오랜만의 좌절감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게 허무했다. 내가 여태까지 쌓아온 내 업무의 필모그라피가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아무것도 손대기 싫었다. 현재 내가 맡은 모든 일들도 하기 싫었다. 회사에선 내가 무얼 하는지조차 정확하게 아는 거 없고 돈돈 거리느라 바쁘고, 내 업무는 돈을 투자해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축낸다고 여기니까. 외부에 알려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게 하고 그걸 매출로 연결시키는 게 내 일인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외부에 알려지는 걸 좋아하면서 왜 돈을 투자하지 않을까? 하는 내 물음표가 풀린 건 정확히 이번 시기였다.
투자 없이는 어떤 대가도 효과도 바라면 안되는데 이곳에선 그걸 바라고 기대한다. 내가 그 기대에 부응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파워블로거의 시대에 멈춘 고루한 사람들의 의견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나의 관점에 동의했던 과거형의 사람이 그랬다. 이런 식일 거면 이 회사에서는 내 파트를 없애야 하는 게 맞다고. 나도 그게 맞다고 본다. 적어도 이 회사에서는 없어져도 되는 부서라고 생각한다.
나와 맞는, 좋은 곳을 찾는 게 더 빠르지 않겠냐고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이란 운을 띄우며 진지한 태도로 얘기를 건네는 상사의 말에 나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살 길 찾기에 나섰다. 에디터 선배와의 진로고민상담 덕분에 어디로 살 길을 터야 할지 방향 잡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다만 걱정이 되는 한 가지는 '나'라는 사람이 받아들여지기에 괜찮을까? 였다. 누가 봐도 저 특이한 이력을 납득할 수 있을까.
모두가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두가 납득 안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될 거다. 이 '어떻게든 되겠지'의 정서는 체념과 한이 아니라 이루어질 거라는, 다짐과 긍정의 정서다.
"저도 혹시나 싶어 다른 곳을 알아봐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알겠습니다. 제 거취가 정해지거나 또는 이직 관련해서 면접일정이라도 잡히거나 하면 미리 말씀드릴게요. 전에 있던 사람들처럼 갑자기 나가지는 않을 거예요. 적어도 그건 지켜야죠."
뭐, 어떻게든 되고 만다.
"맞지도 않는 어떻게든 옷을 입어보겠다고 어떻게든 몸을 밀어넣어봤지만 안 맞는 건 안 맞는 거고 스타일은 한순간에 달라질 리가 없다. 부모님이 내게 했던 말이 있다. 분명 너와는 안 맞는 일인데 그걸 어떻게 버티고 있냐고. 기를 쓰고 있다는 게 보였나보다. 역시 부모님 눈은 못 속이지. 제작을 하던 사람은 제작을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 어제. 과소평가 하지 말라던 선배의 말을 또 어기고 나는 무엇을 해왔는가 하는 생각에 잠겨있었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방문상담 예약을 해둔 주얼리 매장에 가기 위해 저 멀리 삼청동에 다녀왔다. 목걸이를 주문하고 나와 아주 오랜만에 비엔나를 마셨고, 아빠가 사달라던 카스테라 한 박스 사서 광화문까지 쭉 걸어가는 길. 삶의 타협점일지 아님 생각의 전환일지 둘 중 무엇인지 정의내리긴 어렵지만 또 다시 오기가 생겼다. 나한테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앞으로의 나에게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나를 도구삼아 여러 기술을 익히자는 생각으로. 맥가이버칼 뺨치는 도구가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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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비공개 인스타그램 발췌
안 맞는 걸 억지로 맞게 하려 하지 말고 내려놓을 줄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을 갔으면 내가 이렇게 지냈을까? 상상도 해봤지만, 그건 그거대로 고충이 있었을 거다.
지난 한 달을 통해 돌아본 약 1년 5개월의 시간 동안 나는
어떻게든
자알
견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