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하나, 별을 센다

8. 지금 우리는...

by 윤설

잠시 떨어져 있었던 시간들까지 포함하면 그녀와 내가 만나는 건 올해로 3년째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을 새롭게 확인하고도 1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전에 없이 뛰던 내 심장의 이유를 기억한다.

슬프지만 이제 그만하자고 말할지, 우리 사이를 계속 이어가자고 말할지 저울질하던 것도 무용하게 오랜만에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거부할 수 없었던 끌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결혼에 대해 자신이 없는 것도 여전하고, 그녀의 부모님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만나야 하는 상황도 여전하다.

하지만, 그 언젠가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처럼, '나는 그녀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할 때마다 이제는 착잡함 대신 고양감을 느낀다.


"여기서 찍으면 되려나?"


지금 우리는 고운 모래가 깔린 해변에 와 있다.

저녁을 배불리 먹자 그녀가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며 나를 끌고 온 것이다.

해안을 끼고 있는 우리 지역의 특성상 그녀와 나도 장콜만 한 번 타면 금방 바다 구경을 할 수 있다.


초여름을 바라보는 5월 31일, 해가 길어지니 조금 늦은 저녁에도 사진을 찍기 좋았다.

그 때문에 그녀도 지금 가장 예쁜 배경과 최고의 위치를 선점하고 사진을 찍겠다며 저렇게 모래 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여기는 어때?"


"이 시간에 찍기에는 제일 괜찮은 위치인 듯. 거기서 약간 몸을 돌려서 서봐."


똑같이 앞 못 보는 입장에서 나라고 뭘 알겠냐마는 그렇다고 방법이 없지는 않다.

나는 몰라도 21세기의 발달한 인공지능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신다.


휴대전화의 인공지능 앱을 실행한 뒤 실시간 음성 대화 기능을 활성화한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내 폰에 뜬 화면을 같이 볼 수 있도록 화면 공유 기능을 켠다.

이 상태로 카메라를 실행해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들고 말한다.


"내 여자친구의 사진을 찍어 줄 거야. SNS에 올릴지도 몰라. 지금 배경이 멋진 사진을 찍기에 적절할까?"


"지금 배경은 여자친구의 사진을 담기에 충분히 훌륭해. 바다가 펼쳐져 있고 수평선과 하늘이 맞닿는 구도를 표현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야.

다만, 바닷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해초들이 배경을 다소 산만하게 만들고 있어. 조금 왼쪽으로 이동하면 보다 깔끔한 배경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아."


"왼쪽이라고 하면 지금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 기준에서 왼쪽을 의미하는 거야? 아니면 사진 프레임에 있는 인물을 기준으로 왼쪽을 말하는 거야?"


"좋은 질문이야. 지금 카메라를 들고 있는 상태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면 돼."


뭐, 이런 식이다.

지금은 위치에 대해서만 물어보고 있지만, 나중에 적당한 위치가 정해지면 그 뒤로 구도나 앵글, 보정 효과까지 묻고 추천받을 수 있다.


이렇게 그녀와 나는 번갈아가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함께 나란히 서서 셀카 사진도 남겼다.


"좀 걷자."


충분히 소원을 풀었는지 이제야 걷자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바다에서 사진을 찍는 것보다 그냥 머리를 비우고 걷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녀와 나는 여느 때처럼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또 얼마 동안은 서로 아무 말 없는 채로 긴 시간 모래길을 걸었다.

그 사이 해는 완전히 지고 밤이 되었는지 바닷바람이 제법 차졌다.

해변 위에 깔려 있던 사람들의 기척도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돌아갈까?"


집으로 간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까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래."


대답을 들은 나는 휴대전화로 재생하고 있던 음악을 끄고 시각장애인용 경로 안내 앱을 실행했다.


'현재 위치에서 맥도날드 해안로 DT점까지 거리 1200미터, 7시 방향.'


우리가 출발했던 모래사장의 어느 지점 근처, 랜드마크가 될 만한 건물을 정하고 경로 검색을 한다.

그러면 그곳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이동하는 내내 실시간으로 안내해 주는데, 실제 그 건물을 찾아갈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가고자 하는 지점까지 가기 위한 기준점으로 삼을 수는 있다.

나름 유료로 구매하는 앱이라 정확도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녀와 나는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그녀가 자기 휴대전화로 음악을 선곡해 재생했다.


"아직도, 결혼이 무서워?"


서른 넘어서 3년째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으면 슬슬 이런 얘기도 들을 때가 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없는 적막한 모래 위에서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섞여 들리는 그녀의 말은 치명적이었다.

가슴 한켠을 잠깐이나마 내려앉게 하는 둔탁함, 결혼이라는 단어가 마치 질량을 가진 무언가처럼 내 의식을 건드렸다.


"무서운 거랑 불안한 건 다른가?"


한 번의 이별이 있은 뒤로 나는 그녀를 대하는 나의 습관 중 일부를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물으면, 나는 더 이상 침묵하며 망설이지 않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다.

고뇌가 있으면 있는 대로, 해답이 없으면 없는 대로 나의 응답을 내놓는 것,

어떤 신념조차 없는 한심한 대답을 돌려주게 되더라도 같이 고민해 달라고, 내가 이다지도 부족하니까 함께 채워 달라고 그녀에게 조금은 의지할 것이다.


"불안한 건 나도 그래. 내가 너랑 결혼한다고 하면 길길이 날뛰면서 반대할 우리 부모님 반응도 무섭고, 너나 나나 각자 안 보이는데 서로 의지하더라도 결국은 고생하면서 살지 모르는 미래도 불안해."


아! 매력 터진다.

당연하게 예상할 수 있지만 결국은 두려워서 외면하고야 마는 아픈 사실들, 그걸 저렇게 한 점의 망설임 없이 끄집어 내놓는 그녀의 담대함은 언제 접해도 멋스럽다.


"맞아. 나도 그래. 그리고 나는 거기서 하나 더, 내 스스로가 좋은 가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아직도 자신이 없어."


이렇게 말할 수 있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예전에 누군가가 나한테 괜히 고집스러우면서 센 척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보다시피 이제는 아니다.

나의 변화는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로부터 찾아왔다.

그럼 여기서 또 다른 변화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그래도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너랑 살고 싶어."


거친 질감의 모래를 밟으니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난다. 마치 단단하게 뭉친 응어리를 깎아 부수는 것 같이 기분 좋은 소리다.

그 위로 그녀의 목소리가 흐른다.


"어쩌다 한 번 같이 여행 갈 때 말고는 항상 낮에 만났다가 밤에 헤어지는 지금이 싫어.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아기도 낳고 싶어. 여기저기 수소문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 아기한테 좋은 것만 주는 거야.

그렇게 곱게 키운 우리 아이가 편견에 시달리지도, 스스로 편견을 갖지도 않으면서 밝게 커 가는 모습을 너랑 같이 보고 싶어."


이로써 처음 만나자는 고백에 이어 청혼까지도 그녀가 나에게 먼저 한 것이 되었다.

왜 처음부터 그녀가 나에게 먼저 고백을 해왔을까?

우리 만남이 시작됨과 동시에 내 안을 채우던 의문은 내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내가 묻지 않았음에도 그 마법 같은 행운의 기원을 나에게 직접 밝혔다.


그녀가 나에게 최초로 느낀 호감의 이유는 여유로움이었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보내는 편견 섞인 시선을 대할 때에도 그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해 나가는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편견에 저항하거나 돌파하려고 애를 쓴다기보다 마치 그것을 해석하고 풀어내려는 삶을 사는 것 같았다고, 자물쇠를 부수기보다 열쇠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것 같아서 차라리 느긋해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가 만나 왔던 그 누구보다도 편안한 사람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가족들을 비롯해 그녀를 대하는 모든 이들이 불안한 눈초리로 그녀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할 때,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에 도전하는 것이 괜한 위험만 초래하는 것이라며 주변인들로부터의 끝없는 설득에 시달렸을 때,

그리고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설득당하며 사는 다른 장애인들을 만났을 때,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하고 싶었던 그녀가 항상 느껴야 했던 것은 답답함이었다.

그것을 깨부수고 일어날 강인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자기를 채찍질하겠다 마음먹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를 만났다.


무슨 일이든 해내야 한다는 절실함보다 안 되면 다른 우회로를 찾겠다는 낙천적임을 탑재한 남자,

좋게 말하면 유연하고, 나쁘게 보면 태평했던 나의 스타일은 의외로 모든 일들에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독기는 없지만 편안하게 땀을 닦으며 천천히 목적지를 밟는 평화로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 900냥의 자산을 송두리째 잃고 사는 삶인데도 저렇게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녀 나름대로 충격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몇 번 만나 보지도 않고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나라는 사람을 높게 평가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다.

적어도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그토록 뻔뻔하다 싶을 정도의 낙천적임이 나에게서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두렵다.

마치 싫증을 내듯 언제고 내가 먼저 가족이라는 결속을 저버리고야 말 것만 같아서, 내가 그녀와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떠날 결심부터 하게 될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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