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 겨울의 끝에서
후회한 뒤에 다시 돌이키건대, 어쩌면 우리의 관계는 예기된 것이 아니라 방치된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계속 사랑하든 아니면 확실히 이별하든 그때의 내가 분명한 결정을 하고 그녀에게 내 진실한 마음을 얘기할 수 있었다면, 각자의 실패가 그나마 잠시 머무르는 상처로만 그쳤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이 만남도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결심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휘둘리듯 성사되었다는 아쉬움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인생 처음으로 내 사랑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정하고자 했다.
"처음부터 인연의 실을 꽉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이미 한 번 자기 인연을 놓쳐 본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뭐라도 느끼는 바가 있으신가 해서...
"꽉 잡아도 되는 인연을 만나야겠지."
내가 이 이상 무슨 답을 기대했던 걸까? 논리도 근거도 완벽했다. 특히 근거가 너무나도 완벽했다.
"꽉 잡아도 되는 인연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죠?"
슬펐다. 당장 중요한 만남을 하루 앞두고 내가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 번 실패를 경험한 내 아버지뿐이라는 사실이 답답했다.
"너는 벌써 알고 있는 것 같구나. 고민하고 있잖니. 니가 은하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은하 얘기 아닌데요."
더 이어갔다가는 선문답으로 빠질 것 같아 대충 툭 던지고 물러났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는 아버지였다. 저 눈치로 왜 가정의 평화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내일 낮에 거기서 보자.'
영화나 드라마, 소설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그녀에게는 한 가지 재미있는 버릇이 있었다.
자기 의도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대충 던져준 다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반응이 본인의 예상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내기를 주로 걸었다.
그것은 단순한 심리 테스트 수준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우리가 만나는 곳이나 시간, 하고 싶은 일 등이 일치하는지를 직접 체크해야만 끝이 나는 제법 사이즈가 큰 내기였다.
그때도 그랬다. 이별, 아니, 우리의 관계가 방치된 지 50일 만에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만날 것인가?
이에 대한 나의 물음에 그녀가 보낸 메시지가 저것이었다.
내일 낮이라고 하면 도대체 몇 시를 말하는 걸까? 거기는 또 어디일까?
장소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바닷가의 카페일 수도 있고, 우리가 처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횡단보도 앞 가로수 아래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은 바닷가 카페였다. 거기서 그녀는 잠시 시간을 갖자고 말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같은 곳에서 나의 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까?
'내 생각을 읽으려고 하지 말고 니가 가고 싶은 곳을 정하라니까. 자꾸 나한테 니가 맞추려고만 하면 문제를 내는 재미가 없잖아.'
만남의 장소 맞히기에서 내가 세 번을 연달아 틀렸을 때 그녀에게 들었던 말이다.
나는 횡단보도 앞 가로수 아래, 그곳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장소가 좁혀지면 시간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카페든 가로수든 그녀와 내가 의미를 가졌던 장소들은 대부분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가 머물렀던 곳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늘정원아파트 방향 횡단보도입니다.'
그녀와 처음 그 길을 건널 때에는 없었던 음향신호유도기가 어느새 설치되어 있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지팡이를 쥔 내 손에 땀이 찼다.
나는 왜 이곳으로 나오고 싶었을까? 이 길의 끝에 그녀가 없다면 나는 어떤 마음을 먹게 될까? 반대로 그녀가 있다면?
아니지, 혹 내가 먼저 만남의 장소에 도착했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럼 몇 분을, 몇 시간을 더 기다릴까?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이려나? 이쯤 와서도 나의 태도를 명확히 정하지 못했으니 과연 이 만남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뭐라 설명이 힘든 묵직한 마음이 내 안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정원아파트 방향 횡단보도에 녹색 불이 켜졌습니다. 건너가도 좋습니다.'
그랬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가도 좋다는 확신이 들었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차도와 인도의 경계를 이루는 얕은 바닥을 밟았다.
그 뒤로 직진, 몇 걸음만 걸으면 우측은 건물 벽면으로 막혀 있고 좌측은 트여 있는 일자형 보행로를 지나게 된다.
그러면 길의 구조상 왼쪽에서만 따갑게 비치는 햇살을 맞게 되는데, 가로수길은 그 햇살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 지점부터 시작된다.
2월 말의 날씨는 나로 하여금 그 차이를 더 극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가로수길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면 바로 몸을 좌측으로 틀어 아무 나무나 한 그루를 찾는다. 그리고 대각선으로 뻗고 있던 지팡이를 세워 들고 바닥을 두어 번 친다.
-탁탁!
반응이 없었다.
-탁탁탁!
여전했다.
-탁탁 탁탁!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장소나 시간 중 하나만 맞히는 거라면 몰라도 둘 다 적중시키는 것은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른 나뭇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나뭇가지가 거칠게 흔들거리며 이파리가 나부끼는 소리가 들렸다.
사이사이에 타격감 있는 소리가 섞여 들리는 걸 보아 누군가가 장대 같은 걸로 나뭇가지를 건드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도로에 심긴 가로수에 저런 짓을 하면 곤란할 텐데...
지극히 공무원스러운 마인드로 정체 모를 누군가를 비판하던 것도 잠시, 나는 익숙한 향기를 감지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짙은 꽃향과 따스한 재스민향, 그 뒤를 지배하는 시트러스 한 오렌지블로섬...
그녀가 즐겨 뿌리는 향수로 이처럼 달달 상큼한 향을 맡으려면 미들노트, 그중에서도 시간이 제법 지난 뒤여야 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다시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나갔다.
지팡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그저 두 팔로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양 어깨가 내 품을 채우는 감각, 찰랑이는 머리카락이 내 목덜미를 간질이는 각도, 귓가를 스치는 숨, 그 숨결 안에 묻어나는 주파수까지도 다시 새겼다.
평온한 말투로 물어오던 것과 달리 격정적으로 떨리는 숨의 굴곡이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고민하고 있잖니. 니가 은하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그 고민의 끝에 나는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사랑을 말하더라도, 혹은 이별을 고하더라도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자고, 내일 만나면 그렇게 하자고... 그것은 내 마음을 속이는 비겁한 결론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나와 그녀의 이별을 원한다. 그 사실에 못 이겨 내가 결국 헤어짐을 말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나는 최소한 우리의 관계를 늦게나마 정리했다고 자위할 빌미를 만들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 결심은 애초부터 이별을 말할 것을 상정하고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난 날, 나는 이 모든 오산을 갈아치우고 진실한 마음의 방정식을 고쳐 풀었다.
하고 싶은 말, 그제서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
마치 기대듯이 모든 힘을 풀고 나에게 오롯하게 안기는 그녀의 습관, 그 무게가 여전히 내 마음을 벅차게 했기에 그것은 결코 끝을 몰라야 할 사랑이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이렇게 나를 벅차오르게 하는데 왜 나는 도망칠 생각만 했을까?
"미안해."
시기적절하게 나온 그녀의 대답에 내 가슴이 철렁했다.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다행히 어떤 거절의 의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깐 시간 좀 갖기로 했던 우리는 그렇게 제법 긴 시간이 흘러서야 서로의 체온이 닿는 거리에서 마음을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나뭇가지를 흔들었을 때 떨어진 작은 잎이 내 어깨에 묻어 있었다. 나는 마른 잎을 털어버리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설레던 처음 그날처럼 플라타너스의 박수는 없었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 가로수길을 벗어나자, 햇살이 드리우는 포근한 길이 열려 있었다.
겨울이 지는 2월의 끝자락이었고, 봄은 더 기다리지 않아도 어느덧 성큼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