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함께할 결심
"니가 가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야? 그런데 그 고민, 너만 해서 되는 거 아니야.
나도 있잖아. 이렇게 먼저 결혼하자고 얘기하고 당장 같이 시간 못 보내서 안달하는 나도 있는데 너 혼자서 우리가 만든 울타리를 다 부술 수 있을 거 같아?"
강약 중강약으로 밀려오고 빠지고를 반복하던 파도가 돌연 높게 쳤다.
단순히 물결이 일렁이는 소리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움트고 있는 거대한 힘을 둔중하게 드러내는 소리가 있었다. 남자가 눈물 흘리기에 딱 좋은 순간이다.
그녀의 말은 스치듯 지나가면서도 내 굳어 있던 사고방식에 새로운 족적을 남겼다.
나는 내가 나쁘게 변화할 것은 두려워했으면서 정작 그녀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지탱해 줄 것을 기대하지 못했다.
오로지 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는 태도를 내세우며 정작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는 태도를 갖지 못했다.
나도 변할 텐데 그녀라고 설마 안 변할까.
이렇듯 나에 대한 답을 확실하게 내렸다는 오만함으로 그녀를 똑같이 측량하는 우를 범했다.
나와 그녀가 어떻게 해야 우리 부모님처럼 서로를 외면하게 되지 않을지 단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본 적이 있었나? 어리석게도 없었다.
돈을 주고 과자를 사 먹을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정작 그 돈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 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다시금 돌이켜 봐도 내 부모님은 서로 맞지 않았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예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각자가 너무 뾰족했던 건 아닐까?
뾰족함은 그 생긴대로의 쓸모를 따로 가진다. 결코 나쁜 게 아닌 것이다.
하지만 뾰족함이라는 모양의 특성상 그 끝이 가늘다는 명제를 바꿀 수 없다.
각각이 가느다란 첨단을 가진 물체들끼리는 서로 맞닿을 수 없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이라도 모양이 달랐다면, 결과 역시 달랐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와 그녀는 다른가?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녀에게 조금 더 기대기로 마음먹은 때부터 우리 사이에는 전보다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내가 이 고민을 이어갈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나는 우리 부모님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저 질문이 정말 내 인연을 알아보기 위한 기준이 맞기는 한가 보다.
혹시 그녀는 나보다 이미 몇 발짝 앞서서 이런 고민을 했던 게 아닐까? 나에게 그녀가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나랑 결혼해."
그래서 나보다도 먼저 이런 말을 꺼낼 수 있지 않았을까?
천천히 걸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 우리는 길 건너에 있는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씩을 사다 마셨다.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는 조금 높은 계단에 앉아 각자가 들고 있던 캔을 부딪치며 그렇게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이야 봄, 여름, 가을에 걸쳐서 몇 번을 왔던 곳이라 이쪽 해변 일대가 조금 익숙한 편이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 바다 구경을 시켜준다고, 전맹 시각장애인 둘이서도 충분히 바다 보러 갈 수 있다고 꼬시기 위해 내 나름대로는 부단한 노력을 했다.
활동지원사와 동행해 이 근처 지리를 익히는 데에 여러 달이 걸렸다.
한두 번 시간 내고 와서 길게 둘러보면 어느 정도 익힐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장애인 활동지원사의 지원을 받는 데에는 엄연히 서비스 이용 시간이라는 제약이 있다.
월별로 특정 시간 동안만 활동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내 생활에 필수적인 도움을 받기 위한 시간은 따로 남겨 둬야 한다.
그렇게 세분해서 보면 내가 받은 활동지원사 이용 시간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한 달에 한 번씩, 여러 달로 나누어 이곳을 찾아야 했다.
그래도 지금 이러고 있으면서 돌이켜 보면 참 잘한 일이다 하고 여길 때가 많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보통 맥주 한 캔을 다 마시면 이곳을 뜨는 게 우리의 고정된 패턴이었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동의했고, 나는 가지고 온 돗자리를 모래사장 위에 깔았다. 주로 둘이서 쓰는 돗자리지만 널널한 4인용 크기였다.
잔잔하게 오가는 파도를 지척에 두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운 우리는 잠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휴대전화에 설치된 전자책 앱을 실행해 책을 읽어주는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인공지능 앱을 실행했다. 그리고 파일 첨부 메뉴를 호출해 거기에 아까 찍은 그녀의 사진을 첨부했다.
이어서 대화창에 메시지를 적어 넣었다.
'사진 속 인물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묘사해 줘. 그리고 배경도 같이 설명해 줘.'
인공지능 도구 안에 있는 개인 맞춤형 설정 메뉴에 이미 내가 시각장애인이며, 이렇듯 사진 설명이나 글자 읽기 같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적어 두었기 때문에 이제는 AI도 내 요구에 맞춰 작업을 수행한다.
나는 이렇게 그녀의 사진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고 그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AI Tool 응답 시작>:
사진에는 한 여성이 바다를 등지고 서 있으며, 실루엣은 날씬하고 단정합니다.
여성은 연한 하늘빛 블라우스와 검정색 스커트를 입고 있어 청량한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얼굴은 타원형에 가깝습니다.
눈은 평균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정도이고, 얇은 쌍꺼풀과 둥근 눈매가 여성의 인상을 또렷하게 합니다.
코는 약간 높고 곧게 뻗어 있으며, 코끝이 단정합니다.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이 조금 더 도톰하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밝고 친근한 이미지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배경으로 어두워진 하늘과 바다가 펼쳐져 있으며, 그 너머로 작은 불빛들이 몇 점 보입니다.
마치 그려 넣듯이, 내 머릿속에 그녀의 이미지가 확실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나는 몇 번이고 AI가 묘사한 그녀의 모습을 듣고 또 들었다.
대부분 밝은 시간대에 찍은 사진들이 많았기 때문에 슬슬 식상해지려던 참이었는데, 오늘은 거의 해가 지는 무렵에 사진을 찍어서 그런지 느껴지는 분위기가 색달랐다.
"예쁘다."
배경과 하나가 된 그녀의 모습이 확실하게 내 안에 남자, 이런 낯 뜨거운 말도 절로 나왔다.
엄연히 구분해서 말하자면 '예쁘다'보다는 '예쁘겠다'가 맞다.
나는 AI가 전달하는 이미지 묘사를 텍스트로 인식하고 그걸 내 느낌대로 그려 보았을 뿐, 실제 그녀의 외형을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글자의 나열로 빚어진 상태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하는 사람이 실제 내 옆에 있음에 가슴 떨려하는 중이라면, 이 순간 감겨진 눈으로 그녀를 보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예쁘다', 이 사치스러운 감상이 망상으로 취급될 수는 없지 않을까?
"내 사진 보고 있었어?"
자기 얘기하는 줄은 아나 보다.
짧게 중얼거린 내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뒤 몸을 돌려 나를 안아 왔다. 나는 평소보다 더 힘주어 그녀를 마주 안았다.
내 얼굴을 수평으로 훑는 바람결을 느끼자, 문득 내가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다는 걸 실감했다.
밤이 늦었다. 이제 저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떠 있을 것이다.
하루에 하나, 별을 센다. 그렇게 세는 별 하나에 하루라는 시간이 떠나간다.
살아가면서 나는 앞으로도 수천수만의 별을 무미건조하게 셀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내 옆에 항상 같이 있어준다면, 나는 수억 개의 별을, 그 제곱조차 헤아리는 별만큼의 시간을 벅차게 살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그 수많은 별들의 흐름을 닮았다.
"은하야."
"응?"
이름을 부르면 조금 잠에 취한 것 같이 대답하는 목소리가 귀엽다.
"사랑해."
그녀로부터 두어 번, 빠르게 뱉어지는 숨소리가 들린다. 괜히 분위기 잡는 내 식상함이 웃긴가 보다.
"그래."
그녀는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로 응답하지 않았다. 단지 내 마음과 내 결심을 이제는 받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함께 살겠다는, 다시는 끝을 예감하지 않는 미래를 너랑 같이 걷겠다는 내 결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