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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 현 Jun 24. 2020

드라마반 합평


방송작가 교육원에 다닌 지도 일 년이 넘었다. 십 년 전에 한 번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다시 도전해서 다녔으면 지금 작가가 되어 있으려나? 인생에 늦은 때는 없다고 하지만 다른 젊은 동기들을 보면 자꾸 움츠러드는 것도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서 느끼는 슬픈 일 중 하나가 어떤 모임에 가서 자꾸 눈치를 보게 된다는 거다. 나이든 사람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주책이라고 여기지는 않을까, 재미없다고 생각하는데 대우해주는 것은 아닐까.. 등등. 그래서 나이 먹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나보다.     


어제 처음으로 남의 작품을 평하는 공식적인 순간이 왔다. 평생 작가가 되겠다고 써 오던 나이기에 절대로 남의 글을 그 사람 앞에서 평가하는 짓은 하지 않아 왔다. 쓰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늘지 않는 마음도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드라마는 정말 어렵다. 그놈의 플롯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시청자가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를 연구해서 구성을 잘 해야 한다. 나조차도 못 하는 것을 남의 작품을 보고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자격이 어디 있을까 싶어 난 절대 다른 합평시간에도 칭찬만을 하는 것으로 정해 왔었다.    


이번 선생님은 출석 겸 아무나 불러 감상을 묻는다. 첫 번째 작품이 말하기는 좋았다. 제일 내용이 진한 두 번째 작품 때 갑자기 내 이름이 불려졌다. 미혼모 이야기다. 아.. 머릿속에서 탄식이 흘렀다. 순간 좋은 얘기, 칭찬을 생각하다가 주인공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고 읽으면서 짜증스러웠다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 짜증... 또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을 만들고 만다. 물론 미리 메모를 해 가며 평을 적어 놓으면 될 일이었다. 게으름과 무의식 속에 남의 작품을 그렇게까지 평하고 싶지 않다는 안일함이 만든 참사였다.    


한 번 말했으니 다음은 없다. 그 이후로는 다른 이야기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혼모 이야기를 쓴 사람이 받았을 상처에 마음이 쓰여 자책하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아니 30년 가까이 강의를 해 온 사람이 고작 남의 작품 합평 때 쓴 단어가 짜증스럽다 라니!!!내가 문제다. 항상 내가 문제다. 유치한 어휘력과 돌려 말하지 못하는 이 성격도 문제다. 또 고치려고 하다가 결국 주저앉아 버리며 자기애를 극복하는 것도 문제다! 다른 동기들의 현란한 어휘구사와 빙빙 돌려까기를 바라보면서 종국에는 어떤 것이 더 기분 나쁠까를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발 이 지독한 나만의 세계에서 나가자! 평생을 방어기제로 살아 온 이 곳에서 나가보자! 더 반성하여 가면도 쓸 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나보자! 제발 좀 어른이 되자! 철 좀 들자! 강의시간 내내 만회할 기회를 노렸으나 스스로 갈등하다 끝나버렸다. 다행히 내 앞 자리에 아 있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어.. 아까 칭찬을 못 해드렸는데 클라이막스는 정말 좋았어요! 저는 클라이막스를 못 만들고 못 쓰거든요. 그 긴장감은 지금까지의 작품 중 최고였어요! 그러자 시원시원한 답변이 돌아왔다. 뭘요. 괜찮아요. 전 합평 때 더 한 말도 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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