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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 현 Jun 30. 2020

내신의 굴레


대치동에서 요즘은 주로 외고 수업을 하고 있지만 15년 전, 학원을 시작했을 때는 일반고 내신도 많았다. D부고는 일본어 시험 전날 문, 이과를 합쳐 40명까지 내신 수업을 한 적이 있다. 단어 시험과 일작 시험지를 몇 백 장을 혼자 채점을 어떻게 했는지 지금은 내 젊은 시절의 내가 존경스럽다. 요즘은 일반고 학생들은 별로 없고 주로 외고 학생들의 내신을 봐주고 있다.    


어제 D외고 1학년의 수행 전날이었다. 오늘 회화 단어 시험과 듣기 받아쓰기를 동시에 본다. 외고는 기초문법은 한국인이, 회화는 일본인이 가르친다. 4 단위씩 총 8 단위다. 일본어과는 한 반이라 25명이니 1등급이 한 명, 2등급이 2명, 3등급이 3명... 다들 그래도 중학교에서 전교권이라는 학생들이 모였는데 10등 해도 4등급이다. 살아오면서 받아 보지 못한 등급이라고 한다.     


일본어에는 가타카나라는 것이 있다. 주로 외래어 표기에 사용하는데 워낙 잘하는 아이들을 모아 놓아서 변별력을 주려면 까다로운 외래어 가타카나를 단어와 문장에 많이 넣을 수밖에 없다.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패션쇼, 디자이너, 쇼핑.. 일본인들의 영어 발음은 예사롭지 않다. 받침이 없고 모음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다른 언어를 표현하는데 자기네 식으로밖에 할 수 없어 여간 애매한 것이 아니다. 또 장음 부호가 있어 도대체 어디에 왜 들어가는지 잘 이해가 안 갈 때가 많다.      


어제도 밤 10시가 다 되도록 몇 시간째 그 단어들과 씨름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한 참 생각했다. 내신 점수와 등급! 이렇게 우수한 학생들과 일본 문학을 읽고 토론을 하고 리포트를 쓰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수업을 하면 안 되는 걸까? 그럼 학부모들이 점수로 들고일어나겠지... 왜 우리 아이 생각이 점수가 낮으냐고! 결국 이 입시제도 안에서는 할 수 없는 수업이다. 결국 인생은 자신을 온전하게 탐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무나도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    


중계동이 집인 학생이 있어 청담역까지 내 차로 데려다주게 되었다. 10시가 넘어버려 버스로 가기가 너무 늦어서다. 덩치만 컸지 만 14세의 아이가 잘난 가타카나 단어와 의미 없는 문장 외우자고 5시에 학교가 끝나 대치동까지 와서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졸음과 고생하다 12시나 되어야 집에 가고 다시 6시면 일어나서 학교에 가야 한단다. 기가 찬다. 거기다 완벽하게 못 외워 밤을 새워야 할 거 같다고 한다. 유구무언이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나이를 점점 더 먹어서인지 자꾸 마음이 학생들 입장이 된다. 안타깝고 안쓰럽다. 살아보니 별 거 없어서인 거 같다. 돈, 명예, 사랑, 인생의 중요한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매 순간의 최선이, 매 순간의 기쁨이 전부일뿐이다.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서 나만의 기준에 부합하는 온전한 만족감을 누려야 한다. 진정한 자기애만이 소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어제 한 학생 사다 준 햄버거를 받았을 때, 맛있는 고로케을 먹었을 때, 살이 1킬로 빠졌을 때, 좋아하는 아이돌의 새 음반이 나올 때, 새로 만난 한 남학생이 요즘 애들 말로 개 잘생겼을 때, 오늘 내 수업은 없고 강의를 들으러 갈 때...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은 차고 넘친다. 욕심과 남들의 시선을 무시하면 알차고 즐거운 시간은 얼마든지 도처에 널려있다. 이래서 난 돈이 없는 거 같다. 이 비결을 아니 너무 행복만 하다가 금세 단명할까 봐 신이 부양가족과 노동이라는 선물을 주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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