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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훈 Nov 23. 2020

공부, 어른들 말 다 맞는 거야!!

무엇이든 늦었다고 생각할 때 그게 제일 빠르다.

초등학교 저 학년 시절, 그때 나의 성적표는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별다르게 사교육을 받지도 않고, 공부도 크게 한적은 없었다. 부모님 또한 나에게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때 유일하게 부모님께서 나에게 공부를 하라고 이야기한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때쯤 아버지께서 나에게 구구단을 외우도록 강요하신 기억이 전부였던 것 같다. 그때는 골방에 박혀 외운 터라 어렸지만은 생생하게 그때 기억이 난다.


이후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로 전학을 온 후에도 나의 성적은 줄 곳 상위 10%를 유지했었다. 시험을 잘 치렀을 때는 1~2등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놀기를 좋아하던 나의 성적은 중학교 배치 고사를 기점으로 중위권 이하로 고공 낙하하였다.  그때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교 졸업과 중학교 입학 사이 성적이 오른 아이들과 나 사이에 서로 다른 일들이 일어 벌어졌는 것 같다. 


나는 졸업 후 다른 변화 없이 같은 실력으로 중학교에 올라왔는 반면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중학교 입학을 준비한 것이다. 지금의 사교육 방향을 생각하면 내 성적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학원을 가더라도 친구 따라 놀기 삼아 갔던 터라 내 학습 능력은 당연히 제자리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부모님은 먹고살기 바쁘셔서 초등학교 때 나의 성적만 생각하시고 그저 나를 믿고 맡기셔서 그런지 크게 주변에 간섭도 없었기에 그 성적은 납득이 갈만한 숫자였다. 


고등학교 진학 무렵 나는 어렵지는 않았지만 ‘너 인문계 고등학교 못 갈 수 있어’라는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는 신은 나의 손을 놓지 않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를 하셨다.


위 10% 에서 하위 10%로 Change!!


하지만 고등학교 입학이 끝이 아니었다. 바로 첫 번째 모의고사에서 당시 담임 선생님은 나를 포함한 5명의 친구들을 부르셨다. 바로 모의고사 하위 5명 친구들이었다. 그중 나는 당당히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3년간 나의 고교 생활에서 남들과 달리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부분과 노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지지 않은 자유로운 나의 생활은  나의 발목을 항상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기억에 잘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한 것 같다. 비단 그것이 당시 지금 나 혼자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 혼자의 생각 일뿐 고등학교 최종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내가 다닌 대학은 지방의 사립 대학이다. 남들이 들었을 때도 ‘저 지방 어디 대학 나왔어요’라고 이야기하면 같은 지역 사람들은 ‘저놈 공부 안 했구나’ 또는 다른 지역 사람들은 ‘거기 어디야?’라는 물음표를 던지고는 한다. 그렇다면 분명 잘 모르는 그저 그러한 지방의 사립대학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는 우리 대학에 입학한 것이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하였다. 나름대로 남보다  기억에 남는 캠퍼스 생활과 어디에서 보다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등학교 때 나 나름대로의 열심히는 대학교에서도 이어졌다. 그게 효율적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냥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 결과 대학 시절 나의 학점은 상당히 좋았다. 상대평가가 대부분이었음에 어찌 보면 같이 수업을 들은 그들보다 내가 더 열심히 했다고 보는 게 더 맞는 듯하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추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복수 전공인 전산 통계학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교직 이수를 두 과목까지 진행하였다. 지금도 활용도는 낮지 만은 정교사 2급 자격증을 두 개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덤으로 교생 실습의 추억까지 덤으로 얻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추억과 학업적 성과를 얻었지만, 대학 생활에 최대 관문은 바로 취업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학 입학의 필수 조건은 영어이다. 자소서, 학점, 그리고 자격증이나 여러 가지 경험도 중요하지만은 우선은 영어점수가 있어야 했다. 당시 나의 첫 토익 점수는 300점, 신발 사이즈보다 조금 더 큰 숫자였다. 반어법이지만 어느 기업도 나를 받아줄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 1년 정도 걸린 듯하다. 거짓말 조금 붙여서 수능 때 외국어 영역을 5지선다에서 찍는 수준이었는데 토익 800의 점수를 만들기까지 누구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토익 한 두 번에 800은 그냥 받는 언어에 친숙한 친구들도 많이 있었지만 나와 그런 부류와 다소 거리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과정이 어떠하건 간에 원서를 쓸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한 그 가슴 찡한 기억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이후 나는 어렵지 않게 지금의 회사에 입사를 하였고, 나는 당당하게 열심히 대학 생활을 해서 남들보다 많은 경험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 중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입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노력하나는 최고다’라고 주변 친구들이 많이들 이야기한다. 


지금 내 나이가 곧 40이다. 입사 10년 차인 지금도 나는 공부를 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시작해도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이다. 지금 시작해도 2~3개 외국어는 충분히 할 수 있고, 남들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시작할 수 있어서이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남들에 비해 낮거나, 시작점이 느리더라도 그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지금 내가 그렇게 살고 있고, 나는 앞으로도 자신이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시점이다. 시점 현재 시점을 비관한다면 그로 인한 심리적 자괴감은 더 커질 것이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두가 지금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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