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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Sep 02. 2024

함바집의 주양육자와 그의 특권에 대해서

5개월 6일

남편이 오후 반차를 썼다.


하지만 반차의 달콤함은 집에 오는 길에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 한 것이 전부였다. 그 후로는 내도록 육아였다. 그러다 저녁이 되었고, 막수를 하는 남편은 어딘가 멍때리는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해?”

“힘들다…….”

“나약하군.”


그 말 한 마디를 남긴 채, 나는 아기 설거지를 하러 주방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아침과 낮, 저녁의 일과가 모두 육아에 최적화되어 돌아간다. 물론 정신없는 날에는 한두 가지씩 집안일을 빼먹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그때 뭘 해야 하는지 잊지 않으려고 냉장고에 1미터짜리 화이트보드를 붙여놓고 아침저녁의 할 일 목록을 적어두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자동 모드였다. 머리보다 몸이 기억하는 느낌이다. 저녁이 되면 일단 빨랫대에 널어야 하는 빨래들을 해놓아야 밤새 말릴 수가 있으니 세탁기부터 돌려야지. 세탁기 일단 돌려놓고, 그 사이에 막수 끝나면 젖병까지 해서 설거지를 마쳐야겠다. 그래야 스팀소독기를 마지막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


 - - -


아침에는 카페를 다녀오는 일이 루틴으로 정착했다.


분명 지난 달까지만 해도, 카페를 다녀오면 아이가 어느새 유모차에서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 돌아온 다음에도 한동안 땀 좀 식히다가 낮잠을 자러 간다. 깨어있는 시간이 점차 늘어난다더니, 벌써 이렇게 체감이 되었다.


그저께는 스타벅스에서 오랜만에 특이한 음료를 주문해봤다. 임신했을 때 조산기 때문에 눕눕 생활을 한 이후로 카페인을 멀리했더니, 이제는 무려 오전에 카페인 음료를 마셔도 밤잠을 설쳤다. 그래서 매일같이 ‘디카페인 아이스 카페 라떼’를 주문했는데, 그 날 따라 문 앞에 놓인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프렌치 바닐라 라떼……. 디카페인으로 되나요?”

“네, 그럼요.”


처음 들어보는 음료였다. 바닐라 라떼는 알고 있었지만, 프렌치 바닐라 라떼는 뭔가 다르려나?


아이에게 뜨거운 음료가 튀면 곤란하기 때문에 아이스로 한 잔을 시켰다. 그리고는 마치 맥주처럼 쭉 들이켰다. 어쩐지 그냥 아이스 바닐라 라떼와 차이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스타벅스 매니아들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알아챌 수 있을까? 콜라나 라면마저도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무슨 제품인지 아는 사람들이 있던데. 대체 신라면, 진라면, 삼양라면은 어떻게 구분하는 걸까? 너구리는 면발 때문에 그렇다 쳐도…….


 - - -


아이와 함께 카페 외출을 다녀오면, 이후에는 ‘놀-잠-먹’을 진행해준다.


요즘에는 아이가 기특하게도 혼자서 제법 오랫동안 놀기도 한다. 예전에는 조금만 혼자 두어도 “뿌엥!”했는데, 이제는 아기체육관에서 각각의 딸랑이들을 열심히 비교 연구한다. 왼손에는 나무 딸랑이를, 오른손에는 천 딸랑이를 쥐고서, 시선을 천천히 좌우로 번갈아 이동한다.


아이가 그렇게 혼자서도 잘 놀아주는 덕분에, 예전보다 점심을 조금은 여유롭게 먹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샐러드를 정기배송 시켜서 파스타 조금 삶거나 모닝빵 좀 곁들여 먹는 게 전부였다. 음식을 할 시간도, 뜨겁게 데워진 음식을 후후 불어가며 식혀 먹을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어제부터는 샐러드 대신에 밥과 반찬을 차려서 먹기 시작했다. 아이가 자고 있을 때 반찬을 3분할 접시에 덜어서 랩으로 싸두고, 낮 11시 수유 이후에는 접시를 랩째로 전자레인지로 데웠다. 차려놓고 나면 흡사 함바집 식판을 연상케 했다. 고기 반찬과 김치는 필수고, 오이고추 된장 무침은 금상첨화, 무엇보다도 밥은 무조건 큰 공기로.


포장만 뜯으면 되는 샐러드보다는 다소 번거롭지만, 육아는 육체노동이었으며 자고로 육체노동자는 풀떼기만 먹으면 금방 허기진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아버렸다.


 - - -


이건 순전히 내 직감이지만, 최근 2주 사이에 아이의 인지능력이 현격하게 향상되었다.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혼자서 세상을 천천히 탐구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사물과 귀로 들려오는 소리를, 시간을 들여서 이해하고 파악해 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단순히 모빌을 보고 팔다리를 붕붕 휘젓던 신생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놀이 패턴을 보였다.


그러나 직접 겪어본 바에 의하면, 아이는 스무스하게 성장하기보다는 변증법적으로 자랐다. 어제보다 오늘 키가 0.5cm 더 자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크는 게 아니라, 좌충우돌하면서 우당탕탕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 - -


옆잠베개 졸업만 해도 그랬다. 어느 날인가부터 아이는 옆잠베개에 눕히기만 하면 대성통곡을 했다. “세상에서 라라스가 제일 싫어!”라는 듯이, 등을 활처럼 뒤로 젖혀가면서 말이다. 어쩌다 겨우 옆잠으로 재우더라도, 깰 때 눈물을 펑펑 쏟아가며 한참 동안 통곡했기에, 이래저래 도저히 옆잠베개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겸사겸사 낮잠도 등 대고 재우기가 시작되었다. 물론 단칼에 ‘오늘부터 옆잠베개 절대 없음!’ 하고 치워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따금 옆잠베개가 있어야만 재울 수 있겠다는 촉이 올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그냥 옆잠베개에서 재웠다.


아직 뒤집기도 못하는데다가, 자면서 뒤집으려고도 안하는 단계이니 굳이 벌써부터 용 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졸업 시키느라 힘든 것은 지금 힘들든 나중에 힘들든 매한가지일 테니, 옆잠베개로 인한 대성통곡과 등 대고 재우기로 인한 육아 난이도 상승 사이에서 줄타기만 잘하기로 했다.


하지만 첫 시도에서 아이는 겨우 18분만에 깨어났다. 재우느라 20분 걸렸는데, 18분만에 깨다니. 그러나 처참한 나날들이 켜켜이 쌓여가면서 아이의 낮잠 시간은 18분에서 20분으로, 20분에서 30분으로, 또 40분으로, 점차 늘어갔다. 애석하게도, 40분이 다시 25분으로 줄어든다거나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옆잠베개는 졸업했다. 혁명은 피를 수반한다더니, 과연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나는 이 작은 아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혁명들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때때로 ‘이렇게 나 혼자서만 봐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반짝이고 경이로운 일련의 단편들을 의도치 않게 독점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 표지사진 출처: Unsplash의 Valeria Zonc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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