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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_창 밖이 물드는 시간에 (상)

사람의 기억이란 의외로 물건에 많이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by 구의동 에밀리

사람의 기억이란 의외로 물건에 많이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평범한 아침이었습니다. 보통 출근할 때는 일곱 시 한 삼십 분 쯤에 집을 나서는 편이니까, 그에 비하면 그다지 이른 아침은 아니었습니다. 토요일이었고, 아무리 늦장을 부려도 열 시까지는 서촌에 갈 수 있었습니다.


산뜻한 노래를 들으며 옷을 입고 화장을 했습니다. 새로 나온 아이유 노래를 들어봤습니다. 반짝이는 건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햇살도 부드러웠고, 엘리베이터나 CCTV만 아니었어도 거의 춤을 추고 싶은 마음으로 문을 나섰습니다.


경비실에는 ‘순찰중’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텅 빈 의자만 확인하고는 여느 때처럼 아파트 단지 동문으로 향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경비실 바로 옆 향나무 아래에 노란 꽃 두 송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선화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꽃인데, 아파트 화단 돌 틈에 피어 있다니. 밑동이 양파를닮은 것이 수선화가 틀림 없었습니다.


꽃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니, 누군가의 손길이 간 작은 화원임이 분명했습니다. 작은 조약돌이 흙 위를 덮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화초가 두세 포기씩 심겨 있었습니다. 색깔도 분홍, 하양, 빨강등 다양했습니다. 어디 벌레 먹은 자국도 없었고, 검게 문드러진 꽃잎도 하나 없었습니다. 돌이 덮지 않은 곳은 이끼가 덮여 있었습니다. 저는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이끼를 옮겨 놓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평범한 아파트 화단에 이렇게까지 정성이 깃든 공간이 있다니.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 치즈케이크를 먹으며, 저는 그 비밀의 화원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거 누가 매일 들여다보면서 가꾸는 거 같다.


그치?


응. 나도 고양이 키우잖아, 근데 사랑이 없이는 잘 챙겨줄 수가 없어. 돈도 돈이지만 손이 얼마나 가는데.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애기가 금방 병도 나고 밥도 잘 안 먹고 그래.


집에 오는 길에는 석양이 주황빛으로 내리고 있었습니다. 지하철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모두 붉은 빛이었습니다. 고시텔도, 낡은 세무사 건물도, 주민들이 산책하는 동네 천변도, 노을 빛에 물들었습니다. 하늘은 구름이 노을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도 석양을 담뿍 맞고 있었습니다. 경비실 앞에 이르자, 그 비밀의 화원을 누군가가 허리 굽혀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머리에 회색 중절모를 쓴 노신사였습니다. 저는 석양이 만든 따스한 바람에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화단 할아버지께서 가꾸시는 건가요?


아, 안녕하세요. 제가 물을 주고 살펴보기는 하지요. 그래도 이렇게 잘 자라주는 것은제가 아니라 꽃들이 해주는 것이니까, 잘 모르겠네요.


그 말을 하며 저를 향해 웃는 얼굴이 인자해 보였습니다. 저도 할아버지를 보며 웃으려 했는데, 화단 쪽에서 뭔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여서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습니다. 작은 유리 조각이 저녁 노을에 잠깐 비쳤던가, 저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고, 할아버지는 다시 꽃들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뒷짐을 진 채 가만히 보는 모습이 어딘가 석양과 닮아 있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집에서 책을 읽다가 몸이 찌뿌둥해서 산책이나 할 겸 밖으로 나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내렸더니, 그 날도 할아버지가 꽃을 보고 있었습니다. 점잖은 옷차림과 인상은 여전했습니다. 다만 물뿌리개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꽃에 물 주셨나 봐요.


네에. 비가 오면 따로 주지 않아도 될 텐데, 요즘 같은 날씨에는 물을 줘야 꽃들이 목말라하지 않으니까요.


할아버지 정원은 작지만 정말 예뻐요. 아파트 화단 가꾸는 사람들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다들 커다란 도자기 화분을 몇 개 갖다 놓거나 혹은 덩굴진 식물들을 키우더라고요. 그런데 여기는 아기자기해서 마치 동화 속 나라같은 기분도 들어요.


그래요?


할아버지는 허허 웃고는, 아마도 자기가 동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동화 속에 살고 있으시다고요?


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긴 하지만요.


저는 좀 더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서울에서 마주치기란 분명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의 동화는 슬픈 이야기인가요?


그것도, 글쎄요, 슬프다고 하면 슬플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제 또래들을 보면 다들 병 앓고 치매 걸리면서 고생하고 있어요. 그래도 저는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차라리 덜 마음 아픈 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꽃을 물끄러미 쳐다봤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아내 분께서 꽃을 좋아하셨나 봐요?


허허. 좋아했지요. 둘이 살림 차린 집 마당에 꽃나무도 있고 작은 화초들도 있었는데, 우린 꽃이 피는 걸 한 번 밖에 못 봤어요. 얼마 안 돼서 폭격이 시작됐고, 지금은 저만 여기 와 있으니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어떤 꽃들이 심겨 있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질 않아요. 다만 여기에 찾아오는 벌들이나 나비를 보면, 어쩌면 그 집 마당에서 찾아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서…… 계속 들여다보게 되네요.


신기하게도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장미 위에 앉았습니다. 저는 나비에 말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벌이 멀리까지 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휴전선을 넘어 이토록 멀리까지 올 리는 없을 것 같았고, 나비는 더더욱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차르릉.


어디선가 아주 작은 차임벨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고, 이젠 다 늙어서 이명이 또 말썽이네.


네?


아아니, 가끔씩 이렇게 무슨 종소리 비슷한 게 들리네요. 의사도 그런데 종소리라면 자긴 잘 모르겠다고 하고…….


종소리는 저도 들었어요. 방금 뭔가, 되게 맑은데 작은 소리가…….


그래요? 그럼 내가 들은 게 맞나 보네.


할아버지는 신기한 눈으로 저를 보더니, 화단을 다시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습니다.


월요일에는 일이 많아 밤늦게까지 야근을 했습니다. 지하철이 끊겨 택시를 탔습니다. 남산1호터널을 지나면서 저는 뒷좌석에 파묻혀, 스쳐가는 주황 불빛들 안에서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저는 길고 긴 어두운 공간을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불빛도 없고 사람도 없었습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터널인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인지, 그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동굴이라면 똑 똑 떨어지는 물소리라도 들릴 테고, 터널이라면 자동차가 지나다니거나 혹은 등이라도 줄지어 켜져 있어야 할 텐데,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내도록 살다가 수명이 다할 때 죽게 되는 게 운명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서러워졌습니다.


아가씨, 잠들었네. 다 왔습니다.


택시 기사 목소리에 선잠을 깨어 요금을 계산하고 내렸습니다. 하늘에는 달이 조그맣게 떠 있었습니다.


주차장에서 터덜터덜 걸음을 내디디며 집으로 가다 보니 화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꽃을 하나하나 들여다봤습니다. 붉은 장미도 있었고, 별이 흩뿌린 듯이 아주 자그마한 수국처럼 생긴 꽃도 있었습니다. 맨 처음 제 눈길을 끌었던 수선화도 있었습니다. 수선화를 보면서 영국에서 일러스트 공부를 하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과제도 많았고, 손재주 좋은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방에 틀어박혀서 매일같이 작업에만 몰두했습니다.


하루는 작업대에서 한두 발 떨어져서, 학기말 평가를 위해 일주일 내내 매달렸던 작품을 바라봤습니다. 서너 시간씩 쪽잠만 자면서 정성을 기울인 작품이었습니다. 색종이로 점묘 기법을 썼기 때문에 공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게 과연 처음 의도했던 대로 완성될 수 있을까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작품은 매우 마음에 들었고, 손에는 풀과 종이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만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저는 저녁거리도 사고 제게 선물도 하기 위해 마트를 갔습니다. 평소에는 케이크 한 조각을 사왔겠지만 그 날은 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꽃을 마트에서도 파는구나 싶었습니다. 만개한 꽃들도 많았지만 그 날 따라 왠지 봉우리만 져 있는 다발을 꽃병에 꽂아서 한 번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제 모자이크 작품 옆에는 활짝 핀 수선화 한 다발이 햇살을 조용히 맞고 있었습니다. 밤 사이 히터가 방 안 공기를 따뜻하게 데워서, 수선화가 봄인 줄 알고 꽃을 피운 것이었습니다.


차르릉-


햇살 생각에 푹 빠져 있었을 때, 어제 들었던 작은 종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화단에서 나는 소리인 게 분명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쪼그려 앉은 채 어두컴컴한 화단을 뚫어져라 살펴봤습니다.


반짝이는 노란 불빛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주 작은 반딧불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 않을까 싶은 정도의 불빛이 꽃들 사이를 점멸하며 오갔습니다. 불빛은 장미로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날개 달린 작은 사람의 형체를잠시 띠었다가, 장미꽃 위에 누운 채 사라져갔습니다.


요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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