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이란 의외로 물건에 많이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다음 날 회사에서 되도록이면 일찍 마치려고 부리나케 일을 했습니다. 여섯 시 반쯤이 되어 회사 문을 나섰고,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집으로 갔습니다. 지하철 창 밖으로는 한강 수면으로 노을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마침 화단에는 할아버지가 꽃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에게 전날 밤 보았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반짝이는 눈으로 들었고, 우리는 밤 열 시에 다시 화단 앞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숨죽이고 그 비밀스러운 정원을 지켜봤습니다. 차르릉- 종소리가 또다시 들렸습니다. 종소리는 두어 번 더 울리더니, 이윽고 반짝이는 빛이 나타났습니다.
저기요,
저는 요정을 불러봤습니다. 그러자 빛은 점멸하기를 멈추고 공중에 가만히 떠 있었습니다.
혹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빛은 점차 작은 사람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나비를 닮은 작은 날개까지 선명해졌을 때, 요정은 말했습니다.
저 말이에요?
요정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작은 듯 하면서도 또렷하게 들리니 환청이 아닐까 싶기까지 했고, 왠지 종소리와 닮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 할아버지!
요정은 공중에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빙 돌더니, 할아버지의 눈 앞 잠깐 멈췄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요정은 허리 굽혀 인사를 했습니다. 정원이 무척 예뻐요. 이렇게 맑은 마음이 깃든 정원이 아니면 저희 같은 요정은 살 수 없는데, 정말 좋은 정원이에요.
할아버지의 눈은, 주름진 얼굴 안에서 순수하게 빛났습니다. 그렇다니 저도 기쁘네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습니다.
어떻게라도 항상 보답을 해 드리고 싶었는데 말씀 드리질 못했어요. 한낮의 태양은 너무 뜨거워서 밖으로 나오질 못하고 꽃을 오가며 낮잠을 자거든요. 할아버지,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제가 소원을 한 가지 들어드릴게요.
소원이라고요?
네. 덕분에 지난 봄 내내 멋진 정원에서 꿀을 마시며 살았는걸요. 자, 말씀해주세요. 달나라 여행이든, 무엇이든지요.
무엇이든지, 라.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하루만 시간을 줄 수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요정은, 그럼요, 라고 답하고는 절을 한번 한 다음 빛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이튿날 저녁에도 저는 화단을 찾았습니다. 아파트 단지는 저녁 노을에 물들어 있었고, 할아버지는 조금 수심에잠긴 표정으로 꽃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아, 예 안녕하세요. 제가 생각을 좀 하느라고 그만.
할아버지는 다시 꽃들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차 한 잔 사 드려도 될까요?
우리는 홍차를 한 잔씩 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간밤에 한 숨도 못 자며 고민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북한에 혼자 뚝 떨어지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두려움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혹은 아내가 서울로 올 수 있게 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내가 만약 북한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면 난처한 일이었습니다.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마음을 잡아 몇십 년을 살아온 사람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내의 근황이라도 물어볼까 했지만, 아내가 너무 슬프게 살고 있거나 또는 할아버지를 깨끗이 잊었더라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도저히 그것도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도 머리를 굴려봤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케이크 한 조각만 가져갈까요? 요정한테 주려고요.
그래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할아버지는 그 날 처음으로 미소를 띠며 말했고, 저는 가장 작은 초코 케이크를 하나 주문했습니다.
그 날 밤, 할아버지와저는 요정을 찾아가서 이 이야기를 그대로 털어놓았습니다.
정말 소원을 빌지 않으시겠어요? 부자가 될 수도 있고, 세계여행을 할 수도 있어요.
아닙니다, 저는 지금 생활이면 만족해요. 아늑한 집도 있고, 여행이라면 젊은 시절 추억이 남아 있으니까요.
할아버지가 미소 띤 표정으로 바라보자, 요정은 가만히 할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인사를 한 뒤 빛으로 사라져갔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도 저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 식탁 위에는 웬 케이크 한 조각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차, 저는 카페에서 사 놓고 깜박했던 작은 케이크를 들고 요정을 찾으러 다시 내려갔습니다.
또 오셨네요.
요정은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해서 아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음, 맛있는 케이크네요. 고마워요.
저는 요정이 케이크를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어서 물었습니다.
혹시 저도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네, 들어 드리지요. 당신이 이 정원을 볼 때면 따스한 햇살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거든요.
저, 할아버지의 아내께서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실지 한 번 보고 싶어요.
요정은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고 – 한 입이라고 해 봤자 매우 작은 조각이었습니다 –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들어 드릴 수 있어요. 케이크를 꽃잎 위에 두고 요정은 공중으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냥 이대로 있으면 되나요?
네. 다만 이런 여행은 인간이 보통 하는 여행과는 달라요. 무척 빠르고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보이게 될 거에요.
요정은 원을 한 바퀴 돌더니, 제 얼굴 바로 앞에 다가왔습니다. 그 작은 손이 제 이마를 톡 치자, 눈앞이 환한 빛으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젊은 남녀 한 쌍이 이제 막 혼례를 올리는 모습을 봅니다. 남자에게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연지곤지를 찍은 여자는 행복해 보입니다. 두 사람 모두 수줍은 눈빛입니다.
갑자기 저는 어두운 방에 있습니다. 달빛만이 창호지 문으로 스며들어, 방에 누운 두 사람을 비춥니다. 푸르스름한 빛 아래에서 둘은 정사를 치릅니다. 정사는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저는 그 모습이 당황스러워 눈을 돌리고 싶지만, 고개를 돌릴 수도없고 눈을 감을 수도 없습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 없이 저는 오르가슴으로 치달으려 합니다.
숨 쉬기가 힘듭니다. 희뿌연 시야로 갓난아기가 보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아이인가? 부모의 얼굴을 보니 아닙니다. 여자 아기입니다. 아마 할머니의 갓난아기 시절인가 봅니다.
햇빛에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저는 이유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목이 타는 듯이 마릅니다. 사람들이 노역을 합니다. 모두 깡마른 몸입니다. 헐벗은 이들이 한 발 한 발을 고되게 옮깁니다. 누군가 불을 껐다가 켜기를 불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눈앞이 보였다가 깜깜해지고, 또 잠깐 보였다가 다시 깜깜해집니다. 몇몇은 쓰러집니다. 여자 한 명이 쓰러집니다. 바싹 마른 모래 바닥에 피가 배어 나옵니다. 마취라도 걸려 있는 듯, 머리에 둔탁한 어떤 감각이 느껴집니다. 퍼석퍼석한 입 안에 쇠 맛이 납니다.
산들바람이 붑니다. 새 소리가 들리고, 초록 풀밭이 가득합니다. 또래아이들과 웃고 떠드는 여자아이들이 있습니다. 모두 앳되고 순수해 보입니다.
햇살이 순식간에 걷히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입니다. 쥐 죽은 듯한 고요 속에, 풀벌레 소리와 나무 판자가 삐걱이는 소리, 물소리만 간간이 들립니다. 곧이어 수풀을 밟는 다급한 발소리들이 들립니다. 삐이걱 하고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심장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흰 손전등 빛이 어지럽게 널립니다. 몇몇은 철문으로 들어가는 데에 성공하고, 어떤 사람들은 넘어집니다. 넘어진 사람들은 철문으로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는 이들에게 밟혀서 다시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개 한 마리가 치맛자락을 물고 사납게 끌어냅니다. 저는 너무 무섭습니다.
환한 빛으로 가득합니다. 높은 계단이 구름과 함께 하늘 높이 걸려 있습니다. 허공에 놓인 계단의 끝이 어딘지는 몰라도 좋은 곳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어떤 여자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입니다. 여자는 곱게 한복을 차려 입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여자의 허리가 곧게 펴지고, 머리칼에서는 윤기가 납니다. 저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순식간에 지나갔던 모든 해괴한 장면들이 완전히 치유되는 기분입니다.
빛이 점점 사라지고, 저는 늦은 밤 아파트 화단에 서 있습니다.
다음 날 저녁, 저는 할아버지에게 요정이 할머니를 보여줬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눈이 동그래졌다가, 설레는 빛이었다가, 다시 고통스러운 듯 찡그려졌습니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고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 환한 빛으로 가득한 어떤 곳으로 할머니가 가고 있었어요.
그래요,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저를 바라봤습니다. 주름 가득한 눈가로 눈물이 고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게 고맙다는말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제가 지금은, 그, 이끼를 좀 덮어 줘야 해서. 아, 네네, 그럼 다음에 차 한잔 마셔요. 네, 차 한잔, 좋지요.
저는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뒤를 한 번 돌아봤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서,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조심스레 어루만졌습니다. 꽃을 만지는 손길에는 연인의 얼굴을 쓰다듬는 젊은 청년이 있었고, 가만히 앉아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는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노을이 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