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그 날은 봄바람이 부는 좋은 날이었다.
다행히 그 날은 봄바람이 부는 좋은 날이었다.
선글라스를 쓴 소녀가 떡갈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나는 다가가 물었다. 왜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거지?
소녀가 답했다. 시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야.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열 다섯 살이라면 열 다섯 살, 스물 다섯 살이래도 믿을 법한, 앳됨과 조숙함이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인상이었다.
이런 봄날에 왜 시력을 잃는다고 하는 거지? 나는 물었다.
눈은 예민해. 만에 하나라도 잠깐 선글라스를 벗었을 때 어딘가 잘못 반사된 강한 햇빛을 받기라도 한다면 시력을 잃게 될 거야.
나는 잠깐 고민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두 눈으로, 이 소녀는 무얼 보고 살고 있는 걸까. 나는 상상했다. 소녀의 세상에는 언제나 흐린 구름이 드리워져 있는 걸까.
나는 다시 물었다. 아무리 보호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매일같이 어두운 빛으로만 세상을 봐야 하는데. 답답하지 않아?
소녀는, 나는 이미 적응해서 괜찮아, 라고 답했다. 이 세상을 아주 깜깜 못 보게 될 일을 막는 게 더 중요하지.
이번에는 소녀가 나에게 묻는다. 그나저나 못 보던 차림인데, 넌 어디서 왔지?
나는 바다에서 왔어.
소녀의 선글라스 너머로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정말이야?
응. 아침에는 수평선 위로 높다랗게 펼쳐진 구름이 바람을 데려와. 그래서 나는 바다 냄새와 함께 일어나고, 한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 반짝이는 파도 속에서 헤엄을 친단다.
바다에서 온 사람이라니, 소녀는 입을 벌린 채 한동안 놀라워 했다. 나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어. 여긴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니…….
하지만 향긋한 풀냄새가 가득한 아름다운 장소야.
그 말에, 소녀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멍한 얼굴을 씻어내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넌 여길 어떻게 왔지? 이 숲은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내 의지로 온 게 아니야.
소녀는 깔깔 웃는다. 자기 의지로 오지 않았다니, 설마 바람에 날려 오기라도 한 거야?
바람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하여간 여기로 온 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무슨 소리지, 소녀의 표정이 그 안에 맴도는 의문을 내비치고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생일을 맞을 때마다, 어디론가 본인도 모르는 곳에서 아침을 맞게 돼. 그리고 차를 마실 시간이 되면 자기가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와.
그래서 여기에 오게 됐다구?
뭐 어쩌겠어, 조상 대대로 그래온 것을.
소녀는 '이것 참 갈수록 모르겠군' 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소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법도 했는데, 그 당시에 나는 선글라스를 매일같이 쓰고 다니는 소녀야말로 희한한 케이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일 년에 한 번씩만 이런 일을 겪으니까.
그나저나 너, 바다를 보고 싶니?
바다? 당연하지. 할 수만 있다면야. 다만 여기서 바다를 가기에는 너무 힘들어서…… 잠깐, 너 혹시.
소녀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나를 바다로 데려다 줄 수 있어?
어려울 것 없어. 내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내 손을 잡고 있으면 돼.
여기로 다시 오는 건?
손을 놓으면 되지.
놓으면 그냥 바로 이 자리로 돌아오는 거야?
응. 대신에 조금 있으면 차를 마실 시간이 되니까, 얼른 결정해야 할 거야.
그래도 소녀는 한참을 망설였다.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소녀를 기다려 주었다. 그 조그만 머리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거나 하늘을 올려다 보는 동안, 나는 새 소리와 멀리서 전해오는 계곡물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바다는, 여기보다 훨씬 태양이 강렬하지, 아마?
응. 숲 속의 햇빛은 부드럽지만, 바다의 볕은 뱃사람을 닮았으니까.
하지만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손을 내밀었다. 이제 1분 남았어. 그런데 만약 시력을 잃을 게 두려운 거라면 굳이 데려가지는 않겠어. 바다에는 햇빛 말고도 등대라든가 아니면 오징어잡이 배처럼 무척 밝은 빛이 많으니까.
소녀는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움츠러들었다가,
"그래 가겠어"
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순간, 마치 세상이 멈춘 듯 새와 계곡물 소리가 사라졌다. 진공 상태가 되어 버린 듯 봄바람도 느껴지지 않았고, 주위는 이파리 한 장조차 미동하지 않았다. 곧이어 숲의 형태가 빠르게 일그러지면서, 푸른 바다와 모래사장으로 바뀌었다.
소녀는 깊은 인상을 받은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그…….
그리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부웅 -
뱃고동 소리가 멀리서 들려와, 소녀는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푸른 바다는 태양빛에 반짝였고, 나뭇가지 하나 없는 너른 하늘에는 구름이 흩뿌려 있었다.
내 손을 잡은 채로 소녀는 한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선글라스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지.
그리고는 다른 한 쪽 손으로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었다. 아! 이런 색이구나.
소녀는 모든 풍경을, 바다를, 고운 모래사장을, 한없이 이어진 하늘을, 두 눈에 모두 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내게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어서, 나는 이따금 세상이 잿빛처럼 느껴질 때면 그 소녀가 했던 마법같은 말을 떠올린다.
너무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