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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_살인

사람 죽이기 좋은 날이었다.

by 구의동 에밀리

사람 죽이기 좋은 날이었다.


빗소리에는 으레 여자 비명이 섞이기 마련이었다. 여자든, 어린아이든. 비 오는 날이면 아파트에 가만히 들어 앉아 창 밖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빗소리가 듣고 싶어 가만히 들었다. 촤르르... 빗방울 무리에는 사람 마음을 안정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속에는 꼭 차박거리며 뛰어가는 발소리와, 무엇 때문인지 '꺄아-'하는 하이-피치의 목소리가 있었다.




운도 억세게 없는 날이었다.


액땜이야, 액땜. 직장 동료는 호호 거리며 내 어깨를 쳤다. 출근길 버스를 5미터 앞에서 보내고, 15분을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탔다. 내려서 지하철을 타려는데 지하철이 '따라라란-' 하고 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계단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무리 오른편 난간에 끼어서 꾸역꾸역 올라갔다. 기차는 내게 보여주기 위해 조금 기다렸다는 듯이 그제야 천천히 떠나고 있었다. 아, 사원증도 놓고 왔다. 차라리 건물 다 도착해서 알았으면 후회를 느낄 새도 없이 임시 사원증이나 신청할 것을, 딱 한 역 전에 알아버려서 충분한 후회를 곱씹었다.


비 오는 날엔 짬뽕이지. 밀가루 국수와 함께 일련의 사나웠던 일진을 액땜으로 마셨다.




버스를 타고 휘- 한 바퀴를 돌기로 한다. 초록색 1133번 버스를 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잔뜩 적셔진 우산을 대강 접고 버스에 올라탄다. 한 칸 짜리 맨 앞 좌석에 앉는다. 고무 시트에 물방울이 여기저기 맺혀 있다. 이런 건 상관하지 말고 대충 털어서 앉아야 한다...


내 뒤로도 서너 명이 탄다. 다들 차례로, 우산을 접고, 교통카드를 찍고 - 찍으면 '띡' 소리가 나는 것까지 모두 똑같다 - 그리고 앉을 곳이 있는지 한번 휘 둘러보고, 물기 가득한 버스 바닥을 디뎌가며 자리를 잡으러 간다.


흰 와이셔츠를 입고 가벼워 보이는 은테 안경을 쓴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청바지 차림에, 셔츠는 가벼운 외투 용이다. 이 날씨에 겉옷이라니... 남자의 이마와 구레나룻 부위로 땀이 송골송골하다. 그의 습기가 나에게까지 전해오는 것 같다. 오싹, 소름이 끼친다.


- 아저씨 이 버스 화양동 가요?

- 아니요, 안 갑니다.

- 네? 원래 1133번 갔었는데.

- 안 갑니다, 화양동 가실거면 내리세요.

- 내리라고요?

- 네, 뒤에뒤에 오는 4312번 버스 타세요.

- 아니 무슨 버스기사가 이래요, 손님한테?


남자는 담배인지 술인지 알 수 없는 때가 피부를 온통 뒤덮어 검붉은 빛이다. 저 눈은 도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나. '어디'를 향하고는 있는 걸까? 그는 발음이 샌다. 사투리인지 뭔지 그 원인도 종잡을 수가 없는 발음이다. 그는 '씨발, 씨발, 개새끼'를 되뇌면서 뒤돌아 내린다. 버스 기사는 문을 닫고 서서히 출발한다. 버스가 너무도 태연하게 덜컹거리며 평소와 똑같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숨이 막혔다. 감당할 수 없는 피로가 와락 덮쳐온다.




하아, 하아...


꿈 속에서 나는 빌딩 숲 사이를 헤맸다. 분명 김밥집에서 간단히 요기만 하고 나온 참이었는데, 도통 길을 알 수가 없다. 핸드폰으로 네이버 지도를 켰다. 낯선 UI로 지도 앱이 구동된다. 동글동글하고 펑펑 터지는 비눗방울같은 모양들로 가득한 지도다. 대강 여기가, 저기가, 어느 쯤이라는 정도만 가늠이 됐다. 평소 눈에 익었던 건물을 보고 저 쪽이 북쪽이구나 하며 지도를 대강만 참고하고 걸음을 옮긴다.


멀리서부터 비가 내려오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빗줄기는 점차 이쪽으로 반경을 넓혀오더니, 바로 저편 가로수 쯤에 다다르자 눈으로 바뀌었다. 비바람은 눈보라로 바뀌어서 세상은 온통 흰빛 잿빛 투성이다. 눈 앞에 두어 명이 나처럼 눈보라에 힘겨워하며 걸음하는 모습이 보였다. 6월에 눈보라라니, 두려웠다. 커다란 건물 전광판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남녀 앵커는 번갈아가며 현재 기상 상황을 리포트했다. '오늘과 같은 눈보라는 XX년 전에도 발생했던 것으로, ...'


지도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헤매다가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었다. 둘러보니 영 모르는 뒷골목이었다. 골목에 주차된 차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화단도, 길거리도, 하얗거나 혹은 짓이겨져 거무튀튀한 빛의 눈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하려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찌 된 일인지 아무도 기억나지 않는다. 행인들이 나를 지나쳐 갈 때마다 공포를 느꼈다. 이 곳은 대낮이지만 내가 저 중 누군가에게 끌려가서 바로 눈 앞의 건물 안에서 무슨 짓을 당하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것도 나를 무척 챙기는 사람들이 끈질기게 찾아본 끝에야 나는 시체로 발견되겠지.


아침에 깨어 보니 나는 이불 속이었고, 창 밖엔 비가 말 없이 내리고 있었다.




- 아악!


그러나 이것은 네가 잘못한 일이야. 사람이 밀집되어 살면 서로를 싫어하게 된다는 말은 옳은 이야기였다. 버스를 내려서도, 내가 맞이하게 된 건 사람들 무더기였다. 이런 변변찮은 길거리에도 사람이 빼곡하다니. 빗물이 불규칙하게 뚝뚝 떨어지는 우산들 탓에 시야도 앞길도 더욱 가렸다. 내 앞길을 막은 것이 차라리 사람이 아니고 시멘트 혹은 고무로 된 기둥, 가로등, 이런 사물들이면 좋겠어. 앞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타인을 혐오하게 된다니, 그건 너무 병적인 사태다.


우산을 접고 마트에 들어서자, 입구에 서 있던 50대 후반 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건넸다.


- ...@#$%.

- 네?


탐탁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웅얼거려 다시 물었다.


- 그래도 준비성 있는 사람은 우산을 다 챙기네.


빙긋. 나는 힘겹게 웃었다. 아, 내겐 그 웃는 일이 너무 고되었다!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 그것도, '이렇게 하면 더 산뜻해 보일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웃어 보이고. 표정도, 목소리도, 말투까지, 나는 내 안에서부터 자꾸만 비어져 나오려는 짜증을 어떻게든 꾸깃꾸깃 집어 넣으려고 애썼다. 다가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마저 나는 거리를 두려 했다. 도대체 왜! 내 의사와는 상관 없이 나는 감정을 아끼려고 했다. 진심의 유무와는 상관 없이 감정이란 소진되는 존재였다. 마치 끝없이 돈을 모으면서 결국 허망하게 사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분명 집으로 돌아가는 가로등은 노란 태양빛이었지만 너무 무서웠다. 아, 나는 차라리 그 노란 빛을 두려워하지 말았어야 했다. 태양을 따라했다지만 주황색이라 인위적이야, 기괴해...


쏴아아... 내리는 비에는 천둥도 없이 번개만 간간이 있었다.


- 번쩍 했어!

- 응, 번개야.

- 천둥?

- 번개. 천둥은, 소리고.

- 그래도, 천둥번개잖아.


그러게 이상하다, 하게 만들던 어린 소녀와 엄마의 대화도 등 뒤에서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차박, 차박, 백색소음과도 같은 빗속에서 발소리는 더 도드라지게 들렸다.




나는 그 아저씨도 싫었다. 아니, 신문 사라고 내 팔을 붙잡았잖아... 게다가 그 아줌마도 싫었다. 정말, 정말 싫었어... 내가 웬만하면 사람들 전단지 돌리는 거 잘 받는데, 오늘은 진짜 싫은데도 나한테 이렇게 다가와서 막 디밀었단 말야... 게다가 골목 끝나고 있던 지하철 역 앞에는 작은 핸드백 든 곱상한 아줌마가 와서는 '학생, 피부관리실-' 하고 말을 걸었어. 무시하고 걸어가니까 내 팔을 잡는거야... 오지마, 오지마!


그 발걸음도 싫었어. 차박, 차박, 게다가 그 사람마저 내 쪽으로 오고 있었어. 나 진짜 비 안 맞으려고 우산도 얌전히 쓰고 걷고 있었는데... 이제 내게 남은 목표는 내게 달려드는 말소리들을 없애가는 일이었다. 아예 죽여버리고 싶었어...


온다...


다가온다...


나는 뒤를 돌아봤고,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보며 걸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똑똑히 확인되자, 짐승처럼 달려들어 쓰러뜨렸다. 으악! 으아악!


두 우산은 저만치 나뒹굴고,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나는 벽돌을 집어들어 그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내가, 여자를 죽이고 있어, 나랑 똑같은 여자인데...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나자빠졌다. 해괴한 몰골, 빗줄기로 적셔져가는 핏물... 똑같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에 젖어버린 나는 갑자기 뛰어간다. 차박 차박 발소리를 내면서. 으어, 으어엉,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내 비명소리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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