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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Nov 17. 2024

Ch.08 체스 챔피언 엔젤리카 (2)

듣자하니 이 챔피언의 젊은 시절이 기구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다친 것도 아니고, 그저 밥벌이 외에는 목적이 없던 무미건조한 일을 하다가 두 다리를 잃는 사고를 당하다니.

그러나 엔젤리카 본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일면 희미한 미소마저 드리운 채 말을 잇는다.


[엔젤리카]

하지만 그 덕분에 저는 체스에 눈을 뜨게 되었죠. 병동에 있을 때 체스 대회가 있다길래 이래저래 준비를 해보다가 재능을 깨달았던 거예요.

후후, 두 다리를 잃고 나서 체스라는 꿈을 건네 받다니……. 언뜻 보면 인어공주 이야기랑 비슷하지 않나요? 물론 인어공주는 그 반대였지만요.


[엘레나]

그럼 상단주님을 만나게 되신 시기도 그 무렵이었나요?


[루시]

그렇습니다. 멜리사님께서 루비 상단이 병원의 대회 후원을 계속하도록 하셨거든요.


[제이크]

상단주님은 보기보다 마음이 따뜻하네? 장학생도 후원하고, 병원에서는 체스 대회도 후원하고.

겉으로만 봐서는 피도 눈물도 다 돈으로 값을 따질 것 같은데 말야.


[멜리사]

그 쪽도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이런 취미 한두 개 쯤은 즐겨봐~ 은근히 매력 있다구?

아무튼, 그 때도 오늘 챔피언십처럼 내가 결승전 때 직접 참관을 갔는데 말이지. 아니 웬 처음 보는 환자가 체스판 위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거야!

그래서 ‘이 사람이다!’ 싶어서 냉큼 데려왔지.


[엔젤리카]

그 때 제 나이가 서른 여덟이었으니, 딱 5년이 지나서 마흔 셋에 체스 챔피언이 된 거네요.

참 상상도 못 했어요. 이십 대도 아니고, 삼십 대도 후반을 넘겼는데, 제게 이렇게 다른 인생이 펼쳐질 줄은 꿈에도 몰랐죠.


[멜리사]

난 알았는데? 처음에 딱 봤을 때부터 가능성이 보였단 말이야. 나는 인재 보는 눈은 자신 있거든~


과거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는데, 두 번째 요리인 고기 요리가 나온다.

엘레나의 몫으로 나온 ‘소고기 티본 스테이크’는 딱 알맞게 익은 모양새가 육즙을 가득 머금고 있는 모습이다. 사이드로 함께 나온 가니쉬와 네 가지 소스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엘레나가 고기를 나이프로 조심스럽게 썰어서 입으로 가져간다. 이번에는 무슨 감상을 말하려나?


[엘레나]

(사르르 녹듯이 부드러운 감촉이야…….)


[제이크]

흐응, 그래도 아쉽네요. 더 일찍 재능을 깨달았으면 그냥 챔피언이 아니라 ‘최연소 챔피언’ 타이틀도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


[엔젤리카]

뭐,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확실히 외판원 일보다는 체스의 세계가 저는 더 흥미로우니까요.

게다가 외판원을 하지 않았더라면 매일같이 쏘다니지도 않았을 테니, 마차 사고 때문에 두 다리를 잃을 일도 없었을 지도 모르고요.


엔젤리카는 본인의 과거를 풀어내는 내내 평온하고 담담한 표정이다. 태도만 보면 이야기의 내용과 몹시 대조적인 것 같다.

자신의 젊음 뿐만 아니라 건강까지도 모두 앗아간, 지독히도 끔찍하고 공허했던 직업. 그런 과거의 직업을 혐오의 시선 없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모습에서는 어떤 단단함이 느껴진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정착할 곳을 찾을 수 있을까? 더 이상 흔들리지도, 과거의 거센 파도들을 탓하지도 않는, 그런 강인함을 찾아내는 날이 오려나.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지배인이 다가와서 묻는다.


[지배인]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요?

후식은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 ‘스윗츠’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

> 판나코타

  아이스크림 브라우니

  티라미수

[ 확인 ]


~ ‘식후 음료’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

  커피

> 홍차

  그라파

[ 확인 ]


식후 음료 중에서 ‘그라파’라는 메뉴가 눈에 들어온다. 그라파가 뭐지? 술인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판나코타에는 아무래도 술보다 홍차가 어울릴 것 같다.

그 때, 난데없이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화면이 레스토랑 입구 쪽을 비춘다. 그러고는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우당탕탕 달려와서 “쾅!”하고 테이블을 내리친다.


[도로시]

뭐, 뭐야……?!


테이블을 내리친 사람은 전력을 다하기라도 했는지, 고개가 푹 수그려지면서 이번에는 이마가 테이블에 “쾅!”하고 내리쳐진다.

그런 와중에 루시는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멜리사를 보호하는 동작을 취한다. 그러나 상대가 공격력 ‘제로’ 상태임이 명확해지자 이내 전투 태세를 푼다.


[제이크]

두 번째 ‘쿵’은 이마 찧는 소리였지?


[도로시]

……안 아프려나?


[엘레나]

이마로 그런 소리를 내다니…….


[멜리사]

루시, 잠깐만. 이게 무슨 난동……. 에에엥?!

아니, 이거 뭐야, 이마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루시]

……다니엘라 선수네요.


테이블 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난입자(?)가 상체를 확 일으켜 세운다.

푸른색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틀림없는 다니엘라 선수다. 이마가 빨갛게 부어올랐다는 것만 좀 특이하달까…….

다니엘라 선수가 엔젤리카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다니엘라]

히끅……. 당……신!


[엔젤리카]

네?


[다니엘라]

왜 이렇게, 히끅! 강한거야아, 히끅!


[엔젤리카]

……?


그러더니 풀썩 쓰러져서 그대로 엔젤리카의 담요 위에 얼굴을 묻고 쿨쿨 잠이 들어버린다.


[엔젤리카]

흐음. 젊은 선수가 충격이 상당했나 본데.

체스 시합도 그렇고, 이마도 그렇고.


[멜리사]

여어, 이봐? 일어나 보라니까.


[제이크]

깊게 잠든 모양인데.


[도로시]

죽은 건 아니지?


[루시]

사람은 보통 그리 쉽게 죽진 않습니다.


[엘레나]

네?


[멜리사]

흔한 취객이지 뭐. 영영 안 깨어나면 버리고 가는 수밖에.


[엘레나]

이 상태로 완전히 버려지면 정말로 영영 안 깨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멜리사]

걱정되면 힐러님이 데려가 줄래? 운반은 좀 번거롭겠지만, 조~오기 있는 장학생한테 만능 패스가 있으니까 침대 하나 더 빌리면 될 테고.


[엘레나]

엣, 이렇게 떠넘기시는 건가요?

물론 숙식이라면 이 선수도 여행자 패스를 받을 테니까 걱정은 없을 듯 하긴 한데…….


[멜리사]

음? 다니엘라 선수가, 여행자 패스?


[엘레나]

시합 전에 여행관광국 앞에서 봤었거든요. 이 선수, 어디서 봤나 했는데 여행관광국에서였어요.

여행자 패스를 발급 받으려고 기웃거리고 있더라구요.


[멜리사]

흐음, 그건 희한하네. 아쉬울 게 없는 선수인데.


몇 마디 나누고 있는 사이, 파란 머리의 다니엘라 선수가 테이블에서 고개를 휙 들어올려 몸을 꼿꼿이 세운다. 이마에는 여전히 빨간 자국이 떡하니 나 있다.


[다니엘라]

누~가, 히끅! 아쉽대……!


[멜리사]

?

무슨 소리야, 아쉬울 게 ‘없다’니까.


[다니엘라]

나는 지인짜, 히끅! 도망치는 게 아니, 라!

암튼, 그런거야! 딱 기다려어, 어!


그렇게 다니엘라 선수는 한참 주정을 부리더니, 난데없이 레스토랑을 훅 빠져나간다. 엘레나 일행과 레스토랑에 있는 다른 손님들도 다니엘라 선수가 뒤로 하고 나간 문을 바라본다. 참으로 여운이 남는 퇴장이다.

잠시 흐르던 정적을 깨고, 목소리가 등장한다.


[지배인]

어, 음……. 디저트, 나왔습니다만.


[엘레나]

아? 아, 맞죠, 디저트…….


[멜리사]

파랑 머리 선수는 아쉽네. 얌전히 합석했으면 디저트라도 대접할 의향은 있었는데~


[도로시]

이마, 엄청 아플텐데…….


[제이크]

저 정도 충격이면, 역시 길 가다 쓰러질 수도 있으려나?


[루시]

그렇진 않을 겁니다.


[멜리사]

술 깨면 저 알아서 가겠지, 뭐. 다 큰 어른인데.

아무튼, 디저트를 어디 한 입…… 하압!

음, 역시 이 집은 마무리까지 완벽해!


[도로시]

아? 그럼 저도 한 입…….

……헙! 이럴수가?


[멜리사]

어때 어때, 굉장하지?


[도로시]

나리엔 마을에서 먹은 케이크도 정말 맛있었는데, 이건 또 다른 느낌이에요! 그 쪽은 신선하고 달콤했다면, 이 쪽은 고급스럽고 은은한 단맛이랄까요?


[멜리사]

그치? 꼬마 마녀님은 역시 미식가의 자질이 있어!

다음에 어른 되면 다시 와서 ‘그라파’도 마셔 봐. 느끼함을 싹 잡아주니까.

길드 마스터님은 어때?


[엘레나]

으음, ‘판나코타’랑 ‘홍차’, 의외로 궁합이 잘 맞네요. 한쪽은 달콤하고, 한쪽은 쌉싸름하고.


[멜리사]

에잉, 그게 다야?

힐러님은 이번에 여행자 패스 끊은 김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미식 견문을 좀 넓히는 게 좋겠는걸~.


[도로시]

엘레나, 미식이라면 도로시가 여행 가이드를 완벽하게 준비해 줄게!

이 쪽 방면이라면 자신 있으니까~


[제이크]

맞야! 비용 문제라면 여기 이 우수한 장학생만 믿으시면 되고 말야!


[엘레나]

그래? 사치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다면야.


[멜리사]

뭐 얼마나 비싼 걸 먹으려고 그래?


[엔젤리카]

후후, 다들 보기 좋으시네요.

여행자 패스라. 저도 다리가 성할 때 여러분처럼 여행도 좀 즐겨 보면서 살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엘레나]

아, 그러고 보니 엔젤리카 님은…….


[멜리사]

엥, 다들 분위기가 갑자기 왜 이래?

우리 중에 엔젤리카가 제일 여행 많이 다닐 텐데.


[엘레나]

네?


[멜리사]

여기저기로 체스 시합을 다니니까. 전국구는 물론이고 해외로도 원정 경기를 얼마나 많이 다니는데? 이번에 챔피언 땄으니까 아마 앞으로는 더 다닐걸?

아니 엔젤리카, 그렇게 가만히 시치미 뚝 떼고 있지 말고. 지금 나랑 일 시작하고 여권 몇 개 째야?


[엔젤리카]

으음……. 세 개…… 아니면 네 개, 였던가요? 호호, 모르겠어요.


[제이크]

있잖아, 천사님. 여권라는 게 1년에 보통 하나씩 쓰는 거야?


[엘레나]

보통은 안 그렇지.


[루시]

게다가 멜리사님께서 주문제작한 특수 휠체어가 있으시니, 오히려 이동성은 더 좋으실 겁니다.


[멜리사]

그래 맞아! 위급할 때 쓰라고 간이 비행 기능을 넣었더니, 아예 그걸로 여행을 엄청 많이 다녔더만~


[엔젤리카]

그럼요, 상단주님 덕분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죠.

일종의 보상심리랄까요? 젊은 날에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느라 허송세월한 것을 생각하면, 그 때가 오히려 두 발 묶여 지냈던 것 같아서 말이죠.


[엘레나]

그러네요. 엔젤리카님은 이제 직업도, 여행도, 무척 좋아하는 일만 하실 수 있어서 좋아 보이세요.


[엔젤리카]

저도 서른 여덟에 제 인생이 바뀔 줄은 몰랐어요. 이미 외판원 일을 막 시작하던 그 때부터 기운이 빠졌는데, 똑같은 일을 10년 넘게 했으니 당연히 그대로 제 인생이 지루하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걸 생각하면, 미래가 어떻게 될 지는 참 모르는 일 같죠?


[멜리사]

하긴, 그건 맞는 말이야. 나도 지금껏 상단을 운영해오면서, 생각도 못한 변수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으니까.

길드 마스터님은 어때?


[엘레나]

저요?


[멜리사]

그래. 여행길이라든가, 길드라든가. 예상했던 그대로야? 아니면 정반대야?


[엘레나]

아아, 그거라면, ‘정반대’ 쪽에 더 가깝달까요…….

애초에 예상했던 건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 견문도 좀 넓히고 이것저것 생각할 시간도 가져보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동행도 많아지고, 길드까지 생겼네요.


[엔젤리카]

후후, 그렇죠? 인생을 살아보니, 예상대로 되는 일이 오히려 더 드문 것 같기도 하단 말이죠.

하지만 생각은 이렇게 해도, 막상 현실의 어떤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면 그게 꼭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늪처럼 느껴지는 것도 여전한 것 같아요.


[도로시]

우아……. 엔젤리카님은 굉장히 어른스러우세요.


[엔젤리카]

그래 보이나요?

아무튼 그 젊은 선수도 그래서 크게 낙심한 게 아닐까 싶네요.

능력 있는 선수니까, 저의 퀸을 쓰러뜨린 순간에 이미 본인의 패배를 직감은 했을 거예요. 그러지 않았다면 오만하게 마구 달려드는 기세가 느껴졌을 텐데, 눈에서 읽힌 감정은 정반대였거든요. 오히려 결과를 알면서도 끝까지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하는 절박함이 느껴졌달까요?


엔젤리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다니엘라 선수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고 있다. 흡사 파란 털의 고양이를 쓰다듬는 인자한 중년 여성의 모습 같다.


[멜리사]

흐응……. 정말 빼앗아 오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인재란 말이지.


[엔젤리카]

여기 계신 젊은 길드 분들도, 걱정은 조금만 하고, 즐기면서 살아요.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고, 보고 싶은 세상도 한껏 눈에 담으면서요.

쉽진 않겠지만 말이에요.


[엘레나]

걱정은 조금만, 하고 싶은 일은 마음껏…….


[제이크]

천사님, 있잖아.


[엘레나]

응? 갑자기 다가와서는 무슨…….


[제이크]

난 따지고 보면 ‘젊은 분’은 아닌데. 정정해야 할까?


[엘레나]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도로시]

제이크! 엘레나랑 너무 가까워, 떨어져 있어!


[제이크]

아, 내가 좀 가까웠나?


[엘레나]

뭐, 뭐야? 그럼 아까, 진짜 물어보려고 한 게 아니라……?!


[제이크]

후후, 당황한 천사님도 귀엽다니까.


[엔젤리카]

아? 두 분, 그런 사이셨던 건가요?


[엘레나 / 도로시]

아-니-요!!!


그렇게 때로는 왁자지껄하게, 또 때로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새 디저트 접시도 바닥을 보인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레스토랑을 나선 그들. 엘레나 길드는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약속하며 멜리사 일행에게 손을 흔든다. 제이크의 어깨에는 다니엘라 선수가 짐짝처럼 들려 있다.

자, 이제 스토리도 얼추 마무리 되었으니까. 밤도 되었겠다, 체력도 떨어졌겠다, 숙소를 찾아볼까나? 어디 보자, 지도에서 델피온 황성의 여행자 숙소는 어느쯤이려나…….


  

Ch.08 체스 챔피언 엔젤리카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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