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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_시작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서 완벽한 때란 거의 없다

by 구의동 에밀리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서 완벽한 때란 거의 없다.


그녀는 선베드에 누운 채 하늘을 바라봤다. 선글라스를 꼈어도 눈을 뜨기에는 햇살이 쨍쨍했다. 모래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느껴진다. 따뜻하게 데워진 모래가 등에다 훈기를 더해주면, 너무 뜨겁게 공기가 뭉쳐있지 않도록 시원한 바닷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하얀 선베드에 어울리는 하얀 탁자, 적당한 파라솔, 맛없지만 분위기를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 사 둔 코코넛 열매까지. 모든게 뜻대로 갖춰진 휴양지였다.


드디어 풀려난 듯 홀가분했다. 장소가 이렇게 사람 마음을 주무른다. 그리스 해안에라도 온 것 같이 가뿐하지만, 마술사가 뿅 하고 사무실로 순간이동 시킨다면 금세 숨이 턱 막힐 게 뻔했다. 머릿속에는 딱 인간의 시야만큼 한정된 그림 한 장면이 찍힌다. 구두 소리를 재워주는 회색 카페트 바닥, 마음에 들지 않는 사무적인 연두색 칸막이들, 벽면을 따라 들어찬 허여멀건 캐비넷. 이 그림에서 무엇보다도 그녀를 숨막히게 하는 요소는 바로 그 장면 속에 들어찬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옆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고, 저녁 자리에서 맥주나 한 잔 기울여보면 그 한명 한명은 분명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그들의 피부와 얼굴은 단순히 직원을 식별해주는 표식이 아니었다. 밥을 먹다가 웃긴 얘기가 나오면 웃음을 터뜨리고, 종편 드라마가 재밌으면 거실에 앉아 감정을 마음속에 새기고, 섹스를 하면 야한 표정을 참지 못해 내비치고, 이국적인 나라를 여행하며 그 도시의 공기를 피부로 맞이하기 위한 그들 본연의 몸이었다.


손을 뻗어 코코넛 열매 표면에 북실북실하게 난 털을 어루만져본다. 위생이 딱히 미덥지는 않지만,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햇살 가득한 분위기다. 의자 바로 옆에는 대나무로 짠 작은 가방이 있다. 가방 속에는 책이 들어 있고, 손에 굳이 들고 있지는 않더라도 언제든지 책은 손에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집어들 수 있는 시간 속에 놓여 있다. 그 점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로 걸어들어가기로 한다. 뜨겁게 달궈진 고운 모래가 다소 따갑다. 아침 알람 소리에도 30분은 더 -- 물론 5분 단위로 쪼개어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지만 -- 뒤척이는 습관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같았다. 샌들을 신고 가면 덜 뜨거울까? 맞다, 샌들은 오히려 자잘한 조개껍데기가 붙어서 발등을 찌를 수 있지. 맨발로 파도가 들어오는 쪽으로 걸어간다. 햇볕은 바닷물을 반짝인다. 바다는 푸르게 멀리까지 퍼져있다. 그 끝을 상상한다. 저 먼 바다에 점으로 보이는 검은 것들은 파도의 그림자일 수도 있고, 배 한 척일 수도 있다. 물체는 멀수록 작게 보인다, 심지어 그 큰 달과 별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빛나는 동그라미로 축약된다. 바다 위에 옅게 흩어진 구름만큼이나, 바다 표면에 떠 있는 알 수 없는 점점이들이 멀어 보인다, 이런 생각에 그녀는 아득함을 느꼈다.


따뜻한 모래에 이어 곧바로 축축하고 시원한 진흙밭이 발바닥을 적셨다. 찰박찰박, 파도는 기분 좋게 발목을 적신다. 종아리까지 파도가 밀려올 성 싶으면 재빨리 뒷걸음질쳤다가, 사그라들면 다시 둔덕을 내려가는 놀이를 반복했다.


응? 넌 어디서 왔어?


개 한 마리가 곁에 다가와 물장난을 친다. 축 젖어있는 털을 보니, 아마 내 쪽으로 오기 한참 전부터 첨벙거린 모양이다. 연한 크림색의 이런 견종을 아버지가 뭐라 불렀더라... 리트리버! 강아지라고 하기에는 몸집이 자란 리트리버가 노는 모습을, 입도 다물지 않고 눈길로 구경했다. 리트리버는, 그녀보다도 넓은 진폭으로 파도와 모래사장 사이를 뛰어다니며 점차 그녀를 지나쳐 왼편으로 뛰어갔다. 리트리버는 구경꾼이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진행방향도 바꾸지 않고 꾸준히, 꾸준히 옮겨가며 물놀이에 열중했다. 개가 웃는 얼굴로 입을 헤벌쭉 벌리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그녀는 특히 좋아했다.


이런 개의 주인은 누구일까? 젊고 멋진, 캠핑을 좋아할 법한 남자? 그렇다면 활동적인 개와 산책을 하며 어울릴 만도 했다. 아주 딴판으로,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성일 수도 있었다. 그는 아마도, 담배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여하튼 까무잡잡한 피부에, 나이를 먹어서 늘어진 주름살, 어쩔 수 없다는 듯 둥그렇게 나온 복부 등을 내보이고 있겠지. 분명 외모만큼이나 삶마저도, 이제 더 이상 후줄근하지 않고서야 버텨내지 못하겠어요, 라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겠지.


그녀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그녀처럼 맨발로, 그러나 한 손에는 샌들을 들고 개를 따라 걸어간다. 한참 신이 난 개의 모습에 비하니, 여자의 발걸음은 여유롭다. 리트리버는 물 안팎을 뛰어다니다, 앞서 달려가는 어린아이마냥 종종 뒤를 돌아 저 단발머리 여자와 눈을 마주친다. 여자는 개를 보면서 싱긋 웃는다.


싱긋 웃는다?


표정이 익숙했다. 입이 가늘고 길게 옆으로 쭉 퍼지는 모양이, 눈도 따라서 길게 늘어지는 모습이, 적어도 서너 번은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희한하네, 그녀는 생각한다. 나는 부산에 연고도 없고, 친구라면 이름이 떠올라야 하는데. 아니면 적어도 고등학교 동창인지, 대학교 동아리에서 얼핏 스쳤던 사람인지, 그런 상황 정도는 얼추 감이 와야 하는데.


며칠 전에도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녀는 지하철 개찰구 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타고 있었다. 너댓 사람쯤 앞에 선 여자가 무척 낯이 익었다. 그 때는 심지어, 저 여자 말투가 매우 당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자들에게 살살 눈웃음을 쳐서 인상적이었다는 어렴풋한 기억까지 났다. 누구더라. 에스컬레이터가 다 올라갈 때까지도 특정하지 못했다. 비슷한 사람을 봤겠거니 하고 스스로 결론짓고 말았었다. 보름 사이에 이런 데자뷰같은 일을 또 겪다니, 흔치 않네. 그녀는 왠지 이 이상한 기분에 힘입어서 로또나 두세 줄 사야 할 것 같았다. 좋은 복으로 쓰지 않으면 액운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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