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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 내게 그런 일 따위

(연재) 이 참에 비상탈출!

by 구의동 에밀리

사원증이 없다.


멍청하게도 나는 사원증을 사무실 자리에 놓고 그냥 책만 덜렁 든 채 내려왔다. 회사 비상계단은 층마다 사원증을 찍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평소에도 사원증은 꼭 챙기고 다녔거늘, 휴일이라 대강대강 노는 둥 일하는 둥 할 생각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부주의하게 놓고 와 버렸다.


나는 철문 앞에서 이 멍청한 실수에 망연자실해 하고 있었다. 그 때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여길 어떻게 나갈 방법이 없나?’였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예전에 동기가 계단에 갇혔다고 헬프 쳤을 때 엄청 비웃었던 기억이었다. 나보다 네 살은 많은 동기였는데, 계단에 들어가긴 했는데 사원증을 놓고 와서 다시 사무실로 들어갈 수가 없다고, 지금 너네 층이니까 와서 계단 출입문 좀 열어 주면 안되냐고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나는 핸드폰도 없었다는 점에서 그 동기보다도 한심한 상태였다. 그 놈의 축하축하 문자만 없었어도 핸드폰을 분신처럼 가져왔을 텐데. 똥컴이건 핸드폰이건 15분 정도만 좀 자유로워져서 평화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애초에 내게는 잘못된 염원이었나 싶었다. 그런 평화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마음 놓고 생활이 가능한 부자에게나 가능한 것이거늘, 이런 신세한탄까지 하면서.



하는 수 없었다. 남은 건 오직, 1층까지 걸어 내려가서 문을 두드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문이니까 웬만큼 두드려도 다 흡수되어서 소리조차 잘 나지 않겠지. 문이 부셔져라 두드리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겠다. 뭐라고 지르지? “여기-” 다음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살려”는 너무 민망하다. “사람 있어요”도 우습다. 그래도 맞는 말이지, 사람이 있긴 하니까…….


하여간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 동안 알 낳는 닭처럼 일만 해서 못 알아챘는데, 이렇게 한 층 한 층 내려가 보니 층고가 쓸데없이 높은 건물이었다. 빙빙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계단을 한참 내려가도 겨우 여덟 층 내려가 있고, 그런 식이었다. 어지럽기도 하고,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심지어 계단 내려갈 때 사람 움직임이 감지되어야만 켜지는 센서등 뿐이라 처음에는 혼자서 이 어둠을 다 뚫고 내려가기가 무서웠는데, 그 두려움마저 무디게 만들어버리는 단순반복적인 걸음이었다.


많이 내려갔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17층이었다. 28층에서부터 내려갔으니 절반도 안 된 셈이었다. 나는 그냥 모르겠다 싶어서 주저앉아봤다. 사람 다니는 건물 계단에 털푸덕 앉아 있기는 대학생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손에 들린 책을 봤다. 휴, 부럽다. 나는 언제 이렇게 살아보나. 작가는 자꾸,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 말고, 스스로 하고자 해서 하는 일. 자기는 회사를 다니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사장이 자기보다 돈을 몇 십 배는 더 받는다는 사실이 싫어서 그만뒀다고 했다. 그래도 그 때 이 사람은 입사 전부터 자기 사업을 작게나마 하고 있었잖아. 그걸 회사 다니면서 병행하며 키우다가 나간 거고. 나도 이렇게 책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건 좋아했는데.




이런 상상을 하며 가만히 앉아 있어 봤다. 한 30초 정도가 지나자 스르륵 센서등이 꺼졌다. 엄청 무서울 줄 알았는데, 혼자서 계단을 계속 걸어 내려왔더니 익숙해졌는지 오히려 조용한 게 마음 편했다. 온통 깜깜한 가운데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으려니 아랫배가 살살 간지러웠다. 호그와트의 숨겨진 방처럼 어떤 비밀스러운 공간에 숨어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처엉컹!”


그 때 위쪽에서 문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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