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요가를 하다가 런던에서 자전거 타던 때가 생각났다.
체력이 부쩍 약해진 것 같아서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코어에도 힘이 부족했다. 자세는 구부정해지고, 소화불량마저도 체력 때문에 생기는가 싶어졌다.
런던에서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자동으로 운동이 됐다. 등하교도 자전거로 했다. 걸으면 25분이나 걸리는데 자전거를 타면 10분컷이 가능했다. 자전거를 안 타면 버스밖에 답이 없었지만 런던은 버스 한 번 타는 데에 3~4천원 남짓 했는데다가 버스도 학교까지 직통이 아니어서 어차피 앞뒤로 좀 걸어야 했다.
런던 뿐만 아니라 유럽으로 교환학생 다녀온 동문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다들 가자마자 한 첫 번째 임무는 자전거를 구하는 일이었다. 특히 네덜란드 다녀온 사람들은 백이면 백 자전거를 장만했다.
대부분은 중고 시장에서 자전거를 샀다. 학생이라 돈도 없는 데다가 현지에서 새 자전거를 사 봤자 6개월에서 1년 정도 잠깐 쓰고 말 테니 아까운 지출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학기 시작 전에 중고 시장에서 사다가 귀국하기 전에 잽싸게 되파는 방식을 택했다.
런던으로 같이 교환학생을 떠난 친구들 중 한 명은 부지런하게도 일찌감치 자전거를 구했다. 그 친구 역시 중고 시장에서 구했는데 덕분에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헬멧을 안 쓰는 것은 괜찮지만 후미등을 달지 않거나 인도로 달리면 불법이니 과태료를 몇 만원 씩 물 수 있다"거나, "움푹 패인 곳은 반드시 피해 가야지 그렇지 않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밟고 지나가려 하다가는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 십상이다" 같은 팁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도움이 되었던 팁은 "나 자전거 도둑맞았어"였다.
런던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는 자전거 도둑이 극성인 모양이었다. 특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자전거의 도시라 그런지 도난 사건 관련된 교환학생 후기도 많았다. 실제로 여행 갔을 때도 차보다 자전거를 많이 봤고, 공원이나 공터가 보인다 하면 꼭 한켠에는 자전거 무더기가 있었는데 그게 주차를 해 놓는 장소였다. 도난 후기는 제각각이었으나 지금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도난당한 자전거에 특별한 표시를 해 두었는데 그걸 중고 시장에서 파는 자전거에서 발견하고 왕창 따져서 회수해 왔다"라는 이야기였다.
한 번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갔다. 이번에도 네 명이서 팀을 짜서 갔고, 호텔 잡을 돈은 당연히 없었기 때문에 에어비앤비 같은 숙박 플랫폼에서 작은 아파트를 통으로 빌렸다.
아파트라고 해 봐야 서울에서처럼 20층, 30층 짜리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기껏해야 5~6층이 전부이고 건물은 100년 전에 지은 곳들이었다. 다행히 내부는 현대식으로 꾸며 두었으나 엘리베이터는 없는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드나들 때도 키패드식 비밀번호 타입은 없었고, 1층 진입문과 아파트 현관문 각각 1개씩 손바닥 만한 열쇠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집주인을 만났을 때도 우리는 열쇠 꾸러미를 받았다. 집주인은 숙소에 대한 설명을 어느 정도 해 주고 헬멧을 챙겨 문을 나서려고 했는데, 손에 뭔가 이상한 게 들려 있었다.
"저기 그런데, 손에 든 건 뭐예요?"
"자전거 안장이요."
"안장을 가지고 다니세요?"
"네, 도둑이 많거든요."
이 도시고 저 도시고 간에 유럽에는 자전거 도둑이 많은 게 확실했다. 그래서 나는 앞서 말한 친구가 "너는 자전거 따로 사지 말고 공공자전거 대여를 해라"라고 조언한 내용을 착실히 따랐다.
다행히 런던에는 바클레이스(Barclays) 은행에서 파란 로고를 단 공공자전거를 런던 여기저기에 배치해 두고 있었다. 바클레이스 자전거 주차장은 어디 있는지, 주차장마다 대여할 수 있는 자전거는 몇 대이며 주차할 도크는 몇 개 남아 있는지 지도로 확인할 수 있는 앱도 나름 있었다. (참고로 그 때는 다들 '바클레이스 타고 왔어'라는 식으로 고유명사처럼 쓰기까지 했는데, 몇 년 후에 다시 런던을 찾았을 때는 다른 회사로 바뀌어 있었고 로고도 빨간색이었다.)
무엇보다도 가격이 이상할 정도로 저렴하다는 점이 매력이었는데, 1일권은 1파운드(그 당시 환율로 약 1,700원)였으면서 1년권은 45파운드(약 76,000원)이었다. 365일이면 적어도 300파운드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할인이 생각보다 엄청났다. 게다가 1년권을 끊으면 전용 열쇠도 우편으로 보내줘서, 자전거를 빌릴 때 수고롭게 코드를 입력하거나 할 필요 없이 그저 도킹 스테이션에서 교통카드 찍듯 열쇠를 갖다 대면 그만이었다.
덕분에 자전거를 도난 당할 걱정도, 교통비를 감안할 때 '갈 만한 곳인가?'를 따지고 있을 일도 없이 마음껏 런던을 쏘다닐 수 있었다. 오히려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닐수록 본전을 뽑는 셈이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다니기도 했다. 물론 자전거를 탈 때는 시시때때로 멈춰서서 지도를 들여다보기 어려우니 출발하기 전에 미리 길을 머릿속에 좀 새겨둬야 한다는 수고로움은 있었지만, 그 덕분에 교환학생이 끝날 무렵에는 웬만큼 자주 다녔던 런던의 길은 골목골목까지 훤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보고 느꼈던 기억은 이후로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등교할 때 머리 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던 햇빛, 물에 빠질까 조마조마하면서도 노르웨이 친구까지 데려와서 자전거를 탈 정도로 예뻤던 리전트 운하(Regent's Canal), 버킹엄 궁전 앞의 더 몰(The Mall) 대로를 따라 비행기 활주로 날듯이 시원하게 달렸던 기억, 버스나 차로 다녔더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닐스 야드(Neal's Yard) 같은 뒷골목, 1대1 자전거 투어로 현지 가이드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들었던 런던의 이야기들.
한국에 와서는 한동안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며 추억을 되새겼다. 아무래도 서울은 런던처럼 골목 위주라기 보다는 대로가 많아서 곁다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깔짝대기에는 차들이 씽씽 달리는 데다가, 자전거 타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자동차 운전자들에게는 도로 위 자전거란 예상치 못한 요소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런던의 등하교와는 달리, 서울의 출퇴근은 자전거로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딱 한 번 주말에 자전거로 시험삼아 시도해봤는데 일단은 한강변 자전거 도로로 내려갈 때까지는 자전거 입장에서 위험했고 (자동차들이 너무 무서웠다), 강남 근처에 가기도 전에 대한민국 특유의 구릉성 지대가 시작되는 바람에 산악 자전거길이 되어 버렸다. 나름 런던에서는 등교길마다 작은 샛길에서 경사를 넘곤 했지만 그래도 대체로 평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 날로 자전거 출퇴근은 접어두었다.
취미로 가끔 타는 자전거와 실질적인 이동수단으로서 생활 속에 들어온 자전거는 느낌이 무척 달랐다. 런던에서 자전거 바구니에 마트에서 산 식료품을 담아 귀가할 때는 1년 대여권을 100% 활용하는 현지인이 된 것 같아서 뿌듯했고, 파리에서도 공공자전거를 끌고 다니면 소매치기마저 현지인인 줄 알았는지 거들떠도 안 봤다 (아마도?). 심지어 자전거 타고 뮤지컬 보러 가겠다며 길을 나섰다가 완전히 동쪽으로 쭉 가버린 적도 있었는데 (사실 길치인데 용케 다녔다), 그 때마저도 뜻밖의 동네를 탐험하는 재미가 있었다.
언젠가 또 유럽에서 살 일이 있으면 그 때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