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어린이대공원을 산책하다가, 런던에서 봤던 공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가을 밤이라 날씨가 쌀쌀해서 더 생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경량 패딩을 입은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는데도 옷차림이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공원은 어두웠지만 남편과 함께 걸으니 무섭지는 않았다.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도 꽤 많았다.
"이 근처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맨날 올 수 있어서."
영국에 있을 때는 공원이 참 많았다. 런던 지도를 펼치면 바로 눈에 들어오는 대규모 공원만 해도 여럿이었다. 하이드 파크, 그린 파크, 리젠트 파크, 등등.
그보다 작은 공원들은 훨씬 많았다. 학교 가는 길에는 주로 자전거를 탔는데, 자전거 등하교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도보로 3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하루는 친구들끼리 모여서 가장 빠른 등교 루트를 의논했다.
"나는 보통 이렇게 해서 가."
"왜?"
"구글 맵에서 이 경로로 알려주던데?"
"내가 지름길 알려줄게."
그렇게 한 친구로부터 최적의 등교 루트를 전수 받았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경로였다. 아무래도 구글 지도에서는 골목길 같은 정석적인 보행자 도로 위주로 알려준 모양이었다.
친구의 조언대로 경로를 따라가니,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등교 시간이 조금 단축되는 것 같았다. 길쭉한 형태의 작은 공원이었지만 나무와 잔디를 보며 아침 산책을 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이 유용한 팁을 다른 플랫메이트(기숙사는 1인1실이었지만 하나의 주방을 대여섯 명이 공유했는데, 이 친구들을 '플랫메이트'라고 불렀다)에게도 알려주었다.
"학교 갈 때 지름길 루트가 있는데, 알고 있었어?"
"아, 나도 그 길로 가. 공동묘지 얘기하는 거지?"
"뭐?"
충격적인 정체를 듣고 다시 공원을 찾아가봤다. 둘러보니 여기저기 큰 돌이 몇 개 놓여 있었다. 그 동안은 단순히 조형물인 줄로 알았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니 비석이었다. 사랑하는 누구누구를 기억하며, 하는 식의 비문이 적혀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태연하게 산책하고 있었다. 공동묘지가 산책로를 겸하는 공원이 되었다니, 그리고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니 기분이 묘했다. 공원의 으시시한 정체를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지름길은 포기할 수 없었는데다 현지인을 모방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등교길 코스는 그대로 유지했다.
지름길용 공동묘지는 그래도 규모로 볼 때는 공원이라고 할 수 있었던 반면, 기숙사 옆에는 그보다 훨씬 작은 정원 하나가 있었다. 공원이라기에는 너무 작아도 개인 정원이라기에는 조금 큰 면적의 땅에 풀꽃이며 텃밭 같은 게 보였다. 철제 출입구가 늘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울타리 너머로만 구경했지만 누군가가 관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교길에 우연히 그 정원을 지나쳤는데 어쩐 일인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정원 안쪽 저편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 남자 한 명이 화단 턱에 걸터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기심에 기웃거렸더니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길래 다가갔다.
"안녕?"
"안녕. 그냥 궁금해서 들어와 봤어."
"아, 그렇구나. 여기는 우리가 공동으로 가꾸고 있는 정원이야. 이것저것 키우기도 하고."
아마 학교 동아리 같은 모임에서 정원을 돌보는 듯 했다. 정원 한 구석에 앉아서 두런두런 수다를 떨고 웃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잘 꾸며진 유명 카페에서 값비싼 음료를 주문하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시간을 보내는 방식과는 정반대의 휴식이었다. 그 곳에는 가끔 뒷골목으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말고는 그저 조용한 공기와 따스한 햇살, 흔들리는 풀잎 같은 평화로운 것들만 있었다.
개인적으로 제일 많이 들락거린 곳은 학교 앞 공원이었다. 소아즈(SOAS) 대학교 바로 앞에는 러셀 스퀘어(Russel Square)라는 공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가운데 분수를 중심으로 대각선을 따라 사방 산책로가 난 공원이었다. 규모도 꽤 크고 벤치도 많은데다 풀밭과 나무도 있어서, 수업이 끝나고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러셀 스퀘어에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러나 러셀 스퀘어를 특히나 자주 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소아즈 대학교는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라는 이름에 걸맞게 동양과 아프리카 관련 학문으로 유명했는데, 어쩐 일인지 분위기마저도 상당히 다문화적인 특색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각양각색의 정체 모를 '뭔가'도 많이 있었다. 겨울에는 동남아시아에서 볼 법한 석상 모양으로 된 눈사람이 등장하기도 했고, 사시사철 어떤 채식주의 종교 집단(‘하리 크리슈나’라고 들었다)에서 점심 때마다 수레를 끌고 나타나 공짜 밥을 퍼주며 교리를 전파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라는 의심으로 그 의문의 수레를 쳐다보기만 했다. 하지만 공짜 점심을 먹으려는 학생들의 줄은 점심 때마다 길게 늘어섰다. 간혹 어떤 사람은 집에서 밀폐용기를 챙겨와서는 "일회용 접시 말고 여기에 주세요"하고 익숙하게 받는 모습까지 보였다.
결국에는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해서 점심을 공짜로 먹었다. 소문으로는 기부금을 받는다고도 하던데, 실제로 돈을 내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음식을 받았다.
먹어보니 일종의 강황밥이나 카레 같은 느낌이었고, 맛도 꽤 괜찮았다. 게다가 채식주의 종교라니, 이런 평화로운 느낌의 단체에서 남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점심 때면 한 그릇 챙겨서 러셀 스퀘어 벤치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래도 역시 공원과 정원의 가장 큰 매력은 마음 놓고 여유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수업 끝나고 공원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어도 좋았고, 친구랑 리젠트 파크(Regent's Park)에 놀러가서 계란 후라이 모양의 꽃을 보고 신기해 하기도 했다.
큰 공원에는 호수가 있어서 백조가 유유히 떠다니는 모습도 구경했다. 호숫가에 머물던 비둘기 떼를 강아지가 마구 쫓아가는 바람에 새떼가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르는 장면도 보았다.
한 번은 햇살 좋은 날 링컨스 인 필즈(Lincoln's Inn Fields)라는 공원을 발견해서 자전거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느긋하게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되게 평화롭다'라며 먼발치서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어디선가 주인 놔두고 혼자 뛰어온 리트리버가 샌드위치를 노리는 바람에 그 분은 우뚝 서서 빵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있어야 했다.
어쩌면 거의 모든 날 잿빛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걸핏하면 가랑비가 흩뿌리는 런던이었기에, 햇살 좋은 날의 널따란 공원과 아기자기한 정원들이 더 아름다워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돈을 내고 입장해야 하는 실내도 아니고, 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해 한껏 요란하게 치장한 공간도 아닌 장소. 자연이 주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감각이 바로 영국인들이 정원을 좋아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