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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Oct 01. 2023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좋답니다

뚝섬 한강공원에서 드론쇼를 한다기에 놀러갔는데, 외국인이 참 많았다.


요즘 들어 서울에도 점점 외국인이 많이 살기 시작하는 것 같긴 했다. 그래도 비중으로 따지면 겉으로 봐서 한국인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야 하는데, 한강에는 생각보다 외국인의 비중이 꽤 높아 보였다. 


오히려 한국에 사는 현지인들보다 잠깐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이 이 도시가 가진 낭만의 정수를 잘 챙겨먹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나도 해외 여행을 할 때 맛있는 식당도 가고 미술관이나 유적지도 다니면서 저녁에는 술 한잔 걸치기도 했는데, 막상 한국에서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하려면 충분히 여기서도 잘 즐길 수 있는데.


런던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시절이 낭만적으로 추억되는 이유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일 것 같다. 그 때는 학생이었으니 사회인이 된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못했다. 밥도 맨날 학생식당을 가거나 마트 샌드위치를 먹었다. 요새는 점심 시간마다 동료들이랑 "뭐 먹을까?" 하고 회사 근처 식당들을 기웃거리는데, 아마 가격으로 치면 요즘 먹는 식사가 두 세 배는 비쌀 것 같다.


하루는 학생식당에서 볶음밥을 먹고 그 옆에 가서 저렴한 당근 케이크 한 조각과 우유를 마셨다. 그 전에 볶음밥을 먹었을 때는 자잘한 닭고기가 곁들여 나왔는데 이번에는 큼직한 돼지고기 한 덩이가 턱하니 올라가 있었다. 당근 케이크는 예쁜 도자기 접시 대신에 두꺼운 종이로 만든 포장용기에 담아서 팔았고, 우유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따라 내온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았다. 간편하고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좋아하는 케이크까지 먹었으니 더 바랄 게 없이 충분했다.


학생식당에서 먹었던 고기 볶음밥과 당근 케이크. 이제 보니 정말 '학생 밥' 같다.


교환학생 때 살던 집은 구축 기숙사였다. 1인 1실이긴 했지만 방이 크진 않았다. 아마 화장실까지 다 해도 3평 정도였을까? 가구는 침대와 책상, 책장, 그리고 서랍이 전부였다.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에 같은 학교 선배가 조언을 하나 해주었다.


"기숙사가 협소할 거야. 나는 책장을 뒤집어서 서랍 위에 올린 덕분에 공간을 조금 더 쓸 수 있었어."


그래서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기 전에 책장부터 뒤집어서 올렸다. 덕분에 신발을 놓을 공간이 생겼다.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는 데다가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 같아서 나는 그 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막 도착했을 때는 이불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어서 모두 사야 했다.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침 커튼과 카펫 색이 짙은 남색이니 다른 물건들도 웬만하면 파란색으로 맞추기로 했다.


그 밖에도 하나하나 물건들을 들여놓았다. 스탠드도 없어서 사야 했는데, 운 좋게도 늘 멋지다고 생각했던 제도 스탠드를 발견해서 가져왔다. 또 어느 날은 마트에서 무슨 꽃다발을 팔고 있길래 하나를 사봤다. 꽃망울만 달리고 아직 피지 않은 상태인데다 꽃 이름도 (당연히) 영어로 적혀 있어서 무슨 꽃인지도 모르고 샀다. 별 생각 없이 꽃병에 물만 좀 담아주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떠 보니 샛노란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아마 방 안이 따뜻해서 봄이 온 줄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기숙사 방은 점차 나의 취향으로 채워졌다. 책상 앞에 놓인 보드판에는 런던 지도를 큼지막하게 붙여 두었다. 그리고 내가 다닌 도로를 형광펜으로 하나씩 칠해나갔다. 창문에는 노란 포스트잇을 오려 붙여서 꽃무늬도 만들고 글자를 만들기도 했다. 널찍한 창틀에는 작은 상자를 두고 교과서 같은 책들을 책장 삼아 담아두었다.


온전한 나의 작은 세계가 갖춰진 기분이었다.


뒤집어서 올려진 책꽂이와 책상 앞에 붙여두었던 지도, 그리고 늘 가지고 싶어했던 제도 스탠드


물론 부족한 점들은 있었다. 책상만 있고 탁자는 놓을 공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택배 상자 같은 걸 뒤집어서 탁자 대용으로 쓰기도 했다. 욕실 세면대는 온수와 냉수 밸브가 각각 따로 붙어 있어서 사용하기 불편했고, 샤워기는 간혹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씻는 날이면 물이 나오다가 말기도 했다. 그래도 나중에는 나름 노하우도 생겨서, '선착순 샤워'에서 밀릴 때를 대비해 미리 세면대에 물을 어느 정도 받아 두기도 했다.


방은 협소하고, 부족한 가구는 종이 상자로 대충 때우고, 화장실마저 좁고 불편한데다 주방은 공용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때의 생활이 참 좋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할 수 있었으니 불행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헬멧과 형광띠를 챙겨서 밖을 나서면 자전거로 어디든 다녀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지도를 펼치고 '다음엔 어디를 갈까?' 하고 머릿속에 상상하거나 블로그에 일기를 쓰곤 했다. 화장실은 방마다 개별로 하나씩 딸려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여겼고, 주방은 우연히 플랫메이트들을 마주쳐서 이야기 나눌 공간이 되곤 했다.


집에 있다가 날씨가 좋으면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시간 맞는 사람들이 있으면 편의점에서 싸구려 와인이나 묶음으로 파는 맥주를 사다가 부엌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 내도록 얘기를 나눴다. 누군가가 단톡방에 "초코 퍼지 만들었는데, 먹을 사람?" 하고 외치면 쪼르르 달려가서 포크를 들고, 때로는 혼자 학생증을 가지고 근처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기도 했다 (유럽은 상당수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학생들에게 무료로 입장을 시켜줬다). 그래도 할 일이 없으면 <해리포터>를 다시 정주행하면서 친구가 냄비 가득 튀겨 온 팝콘을 나눠먹기도 했다.


친구랑 <해리포터>를 보다가 단톡방에서 누가 "맥주 마실 사람?" 하고 뜬금없이 물어봐서 모였던 저녁. 맥주 열두 캔과 치킨, 감자튀김을 사왔다.


넓고 접근성 좋은 집, 유명 브랜드의 옷과 가방, 값비싼 레스토랑에서의 다이닝, 1박에 몇 십 만원을 태우는 호캉스……. 런던에 있을 때는 이런 것들이 하나도 탐나지 않았는데도 충만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돈은 이미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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