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개다가 생각이 났다.
런던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는 기숙사에 살았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SOAS'라는 이름의 대학교였다.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를 줄인 말이었다. 런던 정경대는 들어봤어도 SOAS라는 학교는 금시초문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무척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유명한 것을 쫓아야 트렌디하고 잘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나는 그 시절에도 별난 것을 더 좋아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SOAS에는 크게 두 개의 기숙사가 있었다. 하나는 딘위디 하우스(Dinwiddy House)라는 이름의 구축이고 다른 하나는 신축이었는데 둘 다 펜톤빌 로드(Pentonville Road)에 자리했다. 겉으로만 봐도 구축은 높아야 4~5층 정도 되어 보이는 벽돌집이었고 신축은 유리로 마감된 높은 건물이었다.
신축에는 헬스장도 있고 방도 널찍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월세도 두 세 배 정도 비싸다고, 그래서 대체로 여유 있는 집 유학생이 신축 기숙사에 가서 산다는 얘기도 들었다. 반면 나는 스스로도 부잣집 딸내미는 아닌데다 주위 친구들도 주로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었던지 다들 구축 기숙사에 살아서 신축은 단 한 번도 방문해 볼 일이 없었다.
딘위디 하우스는 가운데에 있는 정원(물론 그 공터를 영국인들 기준으로는 정원으로 쳐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을 두고 비스듬한 사각형이랄까, 오각형이랄까, 하는 모양으로 건물 동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중 한 동에는 1층에 세탁실이 있었는데, 기숙사 방 안에 따로 세탁기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빨래를 하려면 한 번씩 세탁물을 들고 정원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처음 기숙사에서 배운 생활 가이드 중 하나는 바로 이 무인 세탁실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지금이야 한국에도 코인 빨래방이 보편화 되었지만 그 때만 해도 무인 빨래방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용 방법을 배울 때도 세탁기를 자판기처럼 혼자 결제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름 무척 신기했다.
세탁기를 쓰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금액을 충전해 두어야 했다. 이제 벌써 10년 전 이야기라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교통카드처럼 실물 카드에 충전하는 게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내 세탁실 계정에다가 충전을 시켜두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덜렁 충전카드랑 현금을 들고 세탁실로 향하는 게 아니고, 미리 집에서 노트북으로 홈페이지 들어가서 내 계정 코드에다가 페이팔 같은 수단으로 결제를 시켜두고 세탁실에 가서는 코드만 입력하는 식이었다. 이걸 제대로 못 하면 빨랫감을 잔뜩 들고 세탁실에 도착한 다음에야 '아차, 금액이 모자르네!'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하루는 내가 지지리도 운이 없었는지, 집에서 충전을 할 때부터 홈페이지 패스워드를 까먹어서 비밀번호 리셋부터 시작했다. 그래도 잔액을 확인해보니 0.60 파운드, 그러니까 우리나라 돈으로는 그 당시 환율로 단돈 천 원밖에 안 되는 턱없는 금액 뿐이었어서 '미리 충전 사이트에 들어가보길 잘했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 때가 2012~2013년도였으니 아마 1파운드에 1,700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강 2,000원에 파운드를 곱한 다음, 그보다 조금 덜 되는 정도라고 셈을 했었다.)
충전을 마치고 내 계정 코드를 종이에 적어서 빨랫감을 들고 세탁실에 갔는데, 이런, 자릿수가 두 세 자리 부족했다. 나는 바보같이 내 신용카드 번호를 적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올라가서 제대로 된 코드를 적어다 다시 내려갔는데, 이번에도 틀렸다면서 'no retries, wait to retry'가 떴다. 그 탓에 다시 방에 올라가서 확인해 보니, 페이팔에서 '확인' 버튼만 누르고 막상 홈페이지에서 '최종 결제' 버튼은 안 눌러서 미결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10 파운드를 겨우 결제하고 드디어 세탁을 했다. 빨래 돌아가는 시간은 30분이면 끝나는데 나는 왜 왔다갔다 하느라 30분을 썼을까? 어쩌다 보니 길바닥에서 인생을 보내버린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세탁실에 둔 빨랫감을 아무도 훔쳐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간혹 세탁실에 '내 빨래 가져간 사람 돌려놔라. 건조기 돌리고 있었는데 누가 가져갔냐' 하는 쪽지가 붙어 있곤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남이 입던 옷은 뭣하러 가져갔을까?
또 어떤 날은 괜한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다. 나는 수요일은 '물 수(水)' 자가 들어가니까 빨래하는 날이라고 스스로 정해 두고 매주 세탁실을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문득 '오늘 빨래 안 하면 어떻게 되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궁금하면 해보고 결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던 탓에 그 날은 빨래를 안 해 봤다. 그러자 다음 날 당장 입을 속옷이 부족한 상황이 발생했고, 덕분에 아침부터 속옷 하나를 손으로 조물조물 빤 다음 헤어 드라이어로 급하게 말렸다. 멍청할 정도로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지만 어쨌든 그 날의 실험 덕분에 나는 '세탁을 미루면 입을 옷이 없어진다'라는 교훈을 직관적으로 배울 수 있었고 이후 웬만하면 빨래를 미루지 않는 습성을 갖추게 되었다.
가끔 연구 논문들 중에는 '장기적으로 추적해 봤더니 운동을 꾸준히 한 사람은 대체로 건강해서 행복 지수가 높더라' 하는 식의 뻔한 결과를 위해 10년, 20년 씩 투자한 경우들이 보여서 '대체 왜 이런 낭비를 했을까?'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사람은 생각보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동물이고, 그래서 때로는 당연한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다소 불필요한 수고가 뒤따라야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