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갔다가 런던의 소매치기가 생각났다.
남편과 둘이서 애프터눈 티가 유명하다는 뚝섬의 한 티룸을 방문했다. 가게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들도 있었다.
그 중 한 테이블에는 남녀 커플이 앉아 있었는데, 메뉴를 주문하고는 바로 화장실 키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테이블에는 열쇠와 지갑 같은 소지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영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런던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 스위스 친구 한 명과 친하게 지냈다. 스위스는 주위에 독일도 있고 프랑스도 있고 해서, 동네별로 가까운 국가의 언어를 영어와 함께 바이링구얼로 구사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했다. 그 친구는 프랑스어를 했는데, 마침 전공이 '한국어'여서 친해질 수 있었다.
덕분에 영국에서도 나는 "Hi Emily"보다 "언니 언니"를 많이 들었지만, 타지에서 영어로만 소통하기 보다는 한국어로도 편하게 얘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겨서 좋았다. 그래도 이 기회에 뭔가 외국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친구에게 언어교환을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방학 때 그 친구로부터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나는 친구의 한국어 에세이를 봐주기로 했다.
그 날은 대영 박물관(요즘에는 영국 박물관이라고 하려나?) 근처 스타벅스로 갔다.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고, 평소 궁금했던 어떤 노래의 도입부를 들려주며 물어봤다.
"여기 맨 처음에 프랑스어로 뭐라고 하던데. 무슨 말인지 너무 궁금해."
"알았어. 잠깐 들어볼게."
그리고 친구는 해당 구간을 귀 기울여 반복적으로 들었다. 그러더니 "아! 이거 어느 영화 장면 같기도 한데?"라면서 종이에 받아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친구가 문득 고개를 들고 어딘가에 시선을 멈춘 상태에서 가만히 있었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뜬 채로 한동안 있기에, 이어폰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초집중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어때? 무슨 얘기인지 잘 들려?"
"아니, 그게 아니라. 허걱……."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친구의 시선을 따라 등 뒤로 고개를 돌리니 저 편에 빈 자리가 하나 있을 뿐, 다들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잖아?'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잠시 후 화장실에서 어떤 중국인 아저씨가 나왔다. 그리고 근처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저씨에게 말했다.
"아이고, 너무 미안해요. 그러니까, 저도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
"정말 미안해요,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주위에 앉은 손님들도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두리번거렸다. 나는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친구에게 물어봤다.
"무슨 일이야?"
"아니, 그러니까. 저 남자가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노트북을 도둑 맞았나봐."
"노트북을?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나도 '이게 뭐지?!' 싶어가지고……. 아랍인 두 명이었는데, 계단 올라오자마자 노트북만 들고 바로 튀었어."
유럽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소문은 '유랑'이라는 유럽 여행 카페에서 익히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테이블 위에 스마트폰이나 지갑을 올려 놓았다가 도둑 맞는 케이스였다. 그러면 어디선가 2인조 사기꾼이 나타나서는, 한 명은 지갑 위에 신문 같은 걸 펼쳐서 시선을 차단하고 다른 한 명은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관심을 끈다. 그들이 퇴장하고 관광객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소지품이 사라지고 난 후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이렇게 사람 많은 카페에서 대놓고 노트북을 훔쳐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굳이 카페 2층으로 올라오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덕분에 나는 그 후로 절대 귀중품을 탁자 위에 올려두지 않는 습관을 들일 수 있었지만, 그 동양인 남성의 일은 무척 가엾게 느껴졌다. 중얼거리던 혼잣말 속에 "새로 사면 그만이긴 하지만, 저장을 다 거기다 했는데……" 하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카페나 식당 뿐 아니라 인파 속에서도 소지품은 항상 잘 챙겨야 했다. 특히 어둑어둑한 밤거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증언이 많이 들려왔다. 일례로 홍콩에서 온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밤에 친구랑 길을 갈 때 분명 핸드백을 잘 닫고 다녔음에도 나중에 보니 열려 있었고 지갑도 털렸다는 말을 해 준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10월 말이 되자, 그 친구로부터 빨간 망토 할로윈 코스튬을 빌려서 (정말 착한 친구였다) 당시에 친하게 지내던 교환학생 친구들과 거리로 나섰다. 사람이 많으리라고는 짐작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많은 인파에 우리는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다녀야 했다.
그런데 문득 한 언니가 멈춰서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코트 주머니를 급히 뒤졌다.
"헐! 나 지갑 도둑 맞았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봤는데, 그 때 어느 키 큰 영국인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솔직히 이 때는 이 사람이 도둑인가 싶기도 했다.)
"뭔 일 있어요?"
"여기 지갑 혹시 못 봤어요?"
"……! 도둑 맞았어요?"
"주머니에 있는 걸 확인했는데, 누가 훔쳐간 것 같아요……."
그러더니 아저씨는 옆에 있던 자기 친구를 두고 갑자기 뛰어가기 시작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봐요."
"어이, 어디 가?"
"내가 그거 훔치는 사람 봤다고! 잠깐 기다려 봐. 가서 잡아올게."
그러나 잠시 후 돌아오더니 굉장히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아, 벌써 도망갔네……. 핸드폰 좀 줘 봐요. 경찰에 신고하게."
"여기요."
"여보세요. 경찰이죠? 여기 코벤트리 가(Coventry Street)인데요. 지갑을 누가 도난 당했어요. 제가 카지노에서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여자애 지갑을 훔쳐가는 걸 봤어요. …… 네, 제 이름은 A***고요. 그 사람은 흑인인데, 검은색 자켓에다 청바지 입고 까만 신발 신었어요. 누구랑 같이 걸어가던데, 그 사람은 검은색 자켓 대신에 그냥 흰 티 입었고요."
한참을 통화하고 나서야 핸드폰을 돌려주며 그가 말했다.
"좀 있으면 경찰 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이런 데서는 지갑 꼭 조심해야 해요. 저도 전에 소매치기 당했는데……. 신고를 하더라도 이미 지갑은 없어졌으니, 뭐 어떻게 방법이 없죠."
잠시 후 경찰차가 왔고, 우리는 정황을 대강 설명했다. 그러자 경찰관이 물었다.
"지금 경찰서에 가서 보고하실래요? 아니면 내일 하실래요?"
"지금 갈게요."
그렇게 우리는 네 명이서 경찰차 뒷좌석에 낑겨 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채링 크로스(Charing Cross) 경찰서에 도착했고, 멘붕 상태의 언니가 보고를 마쳤다. 언니는 자책이 뒤섞인 속상한 마음을 연신 털어놓았다.
"내가 분명 주머니에 손을 계속 넣고 다니면서 지갑 잘 있는지 확인했거든. 그런데 잠깐 손을 뺐다가 다시 넣으니까 그 새 없어졌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러니까 말이야. 나쁜 놈들! 그래도 경찰 신고서(police report) 받았으니까, 보험 청구는 할 수 있을 거야. 기운 내, 언니……."
집으로 가는 길에는 왜 그리 비가 억수로 오던지. 우산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런던답지 않게 아주 장대비가 내렸다. 새벽 1시라서 지하철도 끊기고, 야간 버스는 정류장부터 이미 꽉 차 있었다.
우리는 비를 쫄딱 맞고 택시를 탔다. 가디건에 패딩을 입고 왔는데도 추워서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무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런던의 그 유명한 '블랙 캡'을 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래도 할로윈을 이대로 보내기에는 아쉬워서, 각자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부엌에 모였다. 한 명이 감자를 굽는 사이, 언니는 멘탈을 추스르고 초콜릿과 비빔면, 과자 등을 뜯어서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해당 플랫의 학생들 몇 명도 부엌을 찾아왔다.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플랫이어서 금방 우리와 친해졌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일찍 왔어? 할로윈이잖아."
"지갑을 도둑 맞았거든."
"정말?"
그러더니 그 영국인 남학생은 "유감이야……. 영국을 대표해서 사과할게"라며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 다른 손은 옆으로 뻗은 형태의 전형적인 서구식 절이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한 쪽에서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이 활개를 치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자기 잘못도 아니면서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만의 조촐한 할로윈 파티가 끝나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갈 때는 새벽 네다섯 시 쯤이었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