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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Oct 04. 2023

교환학생인데 동아리를 10개나 가입한 사연

갑자기 그 단어가 생각이 안 났다.


하루종일 곰곰이 고민해 봤는데도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스무고개 하듯이 물어보기로 했다.


"있잖아. 이 무술의 이름을 맞춰봐."

"뭔데?"

"춤 같기도 하고 무술 같기도 한 건데, 네 글자에……."

"카포에라?"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와서 왠지 분했다. 흔한 무술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지?


"<철권> 게임에 나오거든. 캐릭터 이름이 뭐더라……."

"에디 아니야?"

"어떻게 알았어?"


이번에는 나의 승리였다. "계속 흐느적 거리는 애 있잖아,"라며 기쁨의 춤까지 췄다.


하지만 내가 카포에라를 알게 된 것은 <철권> 게임이 아니었다. 동아리 때문이었다.



<철권>의 에디. 남편 말로는 왼발, 오른발을 따닥 조작하면 회오리같은 발차기가 나온다고 한다.




런던에서 교환학생으로 맞는 첫 학기였다. 봄에 학사년도가 시작하는 한국과는 달리, 영국은 9월이 새로운 시작이었다.


시작 시기는 달라도 신입생을 유치하려는 동아리 박람회는 만국 공통인 모양이었다. 내가 교환학생으로 갔던 학교는 소아즈(SOAS)라는 대학이었다. 런던의 열 몇 개 대학들이 모여서 '런던 대학(School of London)'이라고 불렸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곳이었다.


그래서 학생회도 소아즈 따로, 런던 대학 연합 따로 있었다. 전자를 소아즈 학생회, 후자를 ULU(University of London Student Union)라고 불렀다. 동아리도 소아즈 동아리ULU 동아리로 나뉘었다.



소아즈 대학교 근처에 있었던 건물. 도서관도 있고 한 걸로 봐서, 여기가 연합 건물인 것 같았다.



먼저 다녀온 선배들로부터, "무릇 교환학생을 가면 현지인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국인'끼리'만 몰려다니면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기는 커녕 영어 실력도 고만고만한 상태로 귀국하게 된다면서 말이다.


게다가 나는 현지인 코스프레를 아주 많이 동경했다. 그들 사이에 동화되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컸던 나에게, 동아리는 절호의 기회였다.


우선은 ULU의 동아리 박람회(Fresher's Fair)를 방문했다. 장소는 건물 실내였고, 체육관과 교실 등이 박물관에서 관람 코스 돌듯이 이어진 형식이었다. 테이블이 부스처럼 죽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다소 김 빠진 분위기여서 거의 허탕을 치고 왔다. 같이 간 사람들 중 한 명은 그 곳에서 펜싱 동아리를 찾아 가입하기도 했는데, 원래부터 펜싱을 했다거나 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아쉽게도 취향에 맞는 동아리를 찾지 못했다.



구역별로 나뉘어 있던 ULU 동아리 박람회. 상업성이 짙거나 기부 단체 성격인 모임도 많아서 나와는 맞지 않았다.



연합 동아리도 이럴진대, 그 하위의 단과대(그 때는 단과대라고 들었는데,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다) 동아리는 더 초라하지 않을까? 팜플렛만 봐도 동아리 개수부터 적었다. 게다가 그 흔한 아카펠라나 오케스트라, 연극 동아리도 없었다. 아니, 사물놀이 동아리도 있는데 어째서?


'그래도 가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소아즈 동아리 박람회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럴 수가? 소아즈 본관(Main Building)에서 열린다는 동아리 박람회는, 실내 공간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건물 바깥에까지 터져나와서 왁자지껄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덕분에 학교 앞 러셀 스퀘어 공원에서부터 동아리 박람회의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린고 하며 따라갔더니, 본관 앞에서 학생들이 아프리카 음악을 연주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나 가끔 보던 음악을 내 또래의 평범한 학생들이 눈 앞에서 북 쳐가며 연주하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음악에 너무도 심취한 나머지, 신입생 유치는 이미 관심 밖이 된 듯 했다. 명단을 받는 테이블을 아무도 지키지 않아서 텅 비어 있었다.



아프리카 전통춤에 심취해 있던 학생들



그 옆에서는 또 다른 아프리카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둥글게 둘러싸서 뭔가를 구경했다. 이건 또 뭘까 싶어하며 기웃거렸더니 역시나 여기서도 원의 한가운데서 두 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누가 춤을 추는지는 고정적이지 않아서, 두 명이 춤을 추다가 한 명이 퇴장하면 자연스럽게 또다른 누군가가 인파 속에서 나와 춤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냥 춤은 아니었다. 뭔가 발차기를 하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격투용 발차기라고 하기에는 느릿느릿하게 움직였고, 서로를 실수로라도 걷어차지 않으려는 듯 동작이 세심했다. 춤이 전반적으로 마치 천천히 추는 비보이를 연상시켰고, 그만큼 물구나무를 설 때도 많았다. 엄청 느리게 추다 보니 전신에 힘이 빡 들어간 것 같았다.


코어 힘이 장난 아니라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댄서 중 한 명이 물구나무 설 때마다 걸리적거렸는지 목걸이를 입에 물고 씩 웃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져서 가입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리 명칭을 물었더니, "유튜브에 '카포에라'를 치면 영상 많이 나올 거야"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 식으로 열 몇 군데의 동아리에 홀린 듯이 이름을 적었다.



카포에라 동아리. 오른편의 활 같은 악기로 음악을 연주했다.



동아리 박람회는 건물 밖에서부터 시작해 본관 1층과 지하까지 주욱 이어졌다.


그 중에는 투자학회(Portfolio Management & Fund)도 있었다. 본교에서도 투자 동아리를 했었기 때문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스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맥 없어 보였던 데다가, 이런 컬러풀하고 반항기 가득한 학교에서 자본주의를 탐색하는 학회라면 내가 뭔가 코드를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싶어서 그만두었다.


한인회는 없는지도 궁금해서 두리번거렸다. 알고 보니 한인회는 물론이고 무슨 나라별로 죄다 동아리들이 있었다.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 등 지역도 다양했다. 만국박람회가 따로 없었다. 


어쩐지 학교 도서관 키보드마저 온 세상 언어가 등록되어 있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다. 역시 소아즈는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라는 이름값을 하는구나 싶었다.



별의별 언어가 이미 등록되어 있었던 도서관의 키보드. 이 도서관에는 어째서인지 <승정원일기> 같은 책까지 있었다.



그러다 흥미로운 포스터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옆에서 동기 언니가 나를 붙잡았다.


"에밀리야, 거긴 아니야~"

"왜?"

"LGBTQ 뭔지 몰라?"


지금이야 LGBTQ가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등을 합한 단어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 때는 그저 엘리자베스 여왕을 빨주노초파남보로 만든 포스터가 기발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흥미롭고 귀여웠던 LGBTQ 동아리 포스터



그만큼 소아즈는 국적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 있어서 다양성이 존재하는 학교였다. 오죽하면 소아즈 3대 바보라는 말까지 있었을까. 첫째가 뭐였는지는 애석하게도 까먹었다만, 둘째는 '정치적 성향을 숨기는 사람', 셋째는 '성적 취향을 숨기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는 집에서 들고 온 1인용 밥솥을 당당하게 꺼내어 학교 앞 공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밥솥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니 괴상했지만, '그래도 여기는 소아즈니까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했다. 게다가 애초에 광고에서도 '도시락통처럼 가지고 다닐 수도 있어요!'라고 했으니까, 뭐 괜찮지 않으려나…….


남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도시락통(=밥솥)에 담아 온 쌀밥과 미트볼은 광고대로 여전히 따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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