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졌다. 코코아를 마시다가 런던이 생각났다.
교환학생 시절에는 마트를 참 자주 갔다. 한국은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편의점이 골목 곳곳에 있지만 런던은 기숙사 근처 편의점이 대부분 영세한 가게였다. 담배 가게처럼 생겨서 기념품이나 우표를 같이 팔기도 하고, 이유는 몰라도 아랍계 사장님들이 많이 운영하시는 것 같았다. 집 가까이에 위치한데다 저녁 늦게까지도 문을 열어서 매력적이었지만, 듣기로는 마트보다 훨씬 비싼 편이라기에 거의 안 가곤 했다.
특히 애용하던 마트는 웨이트로즈(Waitrose)였다. 영국에는 테스코(TESCO), 세인즈베리(Sainsbury)가 가장 대중적이고 웨이트로즈는 그래도 조금 고급형 마트인 듯 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 테스코나 세인즈베리가 엄청나게 물건 값이 저렴한 편도 아니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잘 꾸며지고 물건도 많고 대체로 식품들 맛도 더 좋은 웨이트로즈를 자주 찾곤 했다.
한국은 마트에서 파는 물건들을 보면 플라스틱이나 비닐로 된 용기를 많이 쓰는 편인데, 웨이트로즈에서 사는 식료품은 유리병에 담겨 나오는 게 생각보다 많았다. 투명해서 속이 보인다는 점은 똑같지만 유리병에 든 모습을 보면 플라스틱을 볼 때보다 괜히 대접 받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도 편안해지고 그랬다.
어느 날인가는 코코아를 집에서 타 먹고 싶어서 하나를 사 왔다. 유리병 하나 가득 코코아 가루가 든 제품이었다. '이 많은 양을 언제 다 먹는담?'하고 망설이다가 구매했건만, 부지런히 타 먹어서 한 통을 다 비웠다. 빈 병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일단 깨끗이 씻었다. 기숙사 방 안을 둘러봤더니 연필꽂이로 쓰면 높이도 입구 크기도 딱인 사이즈라, 잘 말려서 필기구를 꽂아 두었다.
사실 교환학생 신분으로는 무엇을 사든 좀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배편으로 부치면 항공 택배보다는 저렴하다지만, 그래도 나중에 귀국하는 날에 온갖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어떤 물건들은 한국의 본가에 이미 있는 것들이어서 중복 구매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적인 물건이 탁상시계였다.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시간에 집착하는 성격이라, 한국에서는 책상에 꼭 시계를 하나 두고 생활하곤 했었다. 하지만 교환학생 떠나는 길에는 옷가지와 생필품 같은 짐만 캐리어에 담았지, 탁상시계까지 챙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멀쩡히 집에 있는 시계를 두고 런던에서 하나를 더 사자니, 돈도 돈이지만 '정말 이런 식으로 소비해도 되나?' 하고 죄책감마저 들었다.
아쉬운 대로 손목시계에 의존하면서 살다가, 우연히 친구로부터 탁상시계 하나를 받았다. 원래 본교에서 교환학생 신청을 받을 때는 한 학기만 갈 것인지 아니면 두 학기 연속으로 1년 간 다녀올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먼저 다녀온 선배들로부터 '한 학기도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좀 짧은 감은 있다'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1년을 선택했지만, 반 년만 다니다 돌아가는 친구들도 꽤 많았다. 그리고 첫 학기가 끝날 무렵, 친구 한 명이 단톡방에 메세지를 띄웠다.
"버리고 갈 짐 정리하는 중인데, 혹시 시계 필요한 사람 있어?"
잽싸게 "나!"라고 대답하고 친구에게 물건을 받으러 갔다. 하트 모양의 빨간색 시계였다. 모양이나 가격을 재고 따지면서 내가 직접 구매한 것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쓰임이 있던 순간에 마침 찾아온 고마운 물건이었다. 겸사겸사, 짙은 색 아니면 흰색 일색이었던 내 기숙사 방에도 포인트가 생겼다.
그 밖에도 누군가의 손을 거쳐서 내게 온 물건들이 꽤 있었다. 누군가가 놓고 간 스페인 여행 가이드북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떠날 참이었는데, 한국어로 된 여행 책자를 얻어서 즐거웠다.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길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수풀을 헤쳤을 때 우연히 획득하는 아이템들이 종종 있는데, 현실에서 그런 식으로 꽤 쓸만한 물건을 손에 넣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개중에는 사이즈가 꽤 큰 물건도 있었다. 누군가가 사람 키 만한 장스탠드를 버려두었는데, 복도였는지 기숙사 야외 정원이었는지 하여튼 쓰레기통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나사도 헐거운 게 상태도 영 별로였고……. 분명, 살 때는 좋아 보여서 샀는데 막상 쓰려니 자리도 많이 차지하고 딱히 마음에 들지도 않아 처치곤란이 되었으리라.
그런데 장스탠드는 가이드북이나 탁상시계와는 달리 사이즈도 무게도 꽤 나갔다. 툭 쳤을 때 넘어지면 안되는 가구였기 때문에 바닥의 넓고 동그란 받침 부분이 특히 무거웠다. 스탠드를 번쩍 들고 가다가, 무거우면 내려놓고 기울여서 살살 굴리기도 하면서 기숙사 주방까지 데려갔다.
운반에 애를 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상 부엌에서 불을 켜 보니 공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뿌듯했다.
"자, 내가 준비한 게 있지!"
"뭔데?"
"있어 봐. 이렇게 스탠드 불을 켜고, 형광등을 끄면!"
때마침 인도인 플랫메이트가 간식을 가지러 냉장고를 찾아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한 마디를 던졌다.
"오호~ 갬성 조명~ (Mood lighting!)"
그래도 꼭 필요한 물건은 당연히 구매를 했다. 그런 건 '어디 누가 버리고 간 것 또 없나'라며 하염없이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일찌감치 사서 오래 쓰는 게 고민도 덜고 속 편한 선택이었다.
특히 빨간색 밀폐용기를 두어 개 세트로 구매해서 아주 잘 사용했다. 된장국을 끓여서 담으면 딱 1인분 용량이 되어서 매우 요긴했고, 종갓집김치를 한 팩 사서 옮겨 담아도 사이즈가 꼭 맞았다. 뚜껑에 증기 배출구를 똑딱이로 여닫을 수 있어서 전자레인지에 돌리기에도 부담 없었다.
덕분에 끼니마다 밥상에는 늘 빨간색 밀폐용기가 있었고, 지금도 사진을 뒤적이다가 빨간 용기를 보면 교환학생 시절이 자동으로 떠오르곤 한다. 지금이야 결혼도 했고 그 때처럼 4평 남짓 하는 집에 살고 있지도 않으니 각종 그릇이며 반찬통이 찬장에 가득가득하다. 넉넉한 탓에 마음 편하게 꺼내어 쓸 수 있다는 점은 편리하지만, 몇 개의 밀폐용기만을 구매해서 정이 들 정도로 자주 사용하던 그 때가 왠지 더 몽글몽글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옷도 대체로 '꼭 필요한' 것만 구매했는데, 실용적으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아이템은 가죽 장갑과 부츠, 그리고 레인 코트였다.
런던에서는 대중교통마저도 무척 비싸서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물가 만큼이나 악명 높은 날씨는 과연 듣던대로여서, 걸핏하면 쌀쌀해지고 비가 흩뿌렸다. 차라리 한국처럼 겨울의 혹독한 추위나 여름의 기세 좋게 쏟아지는 집중호우 같은 게 런던의 날씨였다면 다 포기하고 얌전히 대중교통을 탔을 텐데. 날씨가 안 좋아봤자 애매한 수준이라, 자전거를 타긴 타되 손과 발목이 시리고 때로는 가랑비를 맞기도 했다.
결국, H&M이나 망고처럼 저렴한 SPA 매장에 들러서 장갑과 부츠를 샀다. 그런데 이 방한도구들은 생각보다도 훨씬 효과가 좋았다. 특히 장갑은 진짜 가죽도 아니고 인조 가죽으로 만들었는데도, 구멍이 숭숭 뚫린 털장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을 잘 막아주었다.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이 오로지 멋을 부리려고 가죽 자켓에 가죽 장갑 차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실용성 때문이었다니! 가죽 장갑을 끼면 추운 날 자전거 핸들을 붙잡고도 아무 걱정 없이 씽씽 잘 달릴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도 가죽 장갑과 부츠, 그리고 레인 코트는 런던을 떠올리게 하는 기념품이 되었다. 날씨가 좀 추울 때 자전거나 킥보드(아직도 전동 대신에 발을 굴려서 가는 킥보드를 탄다) 탈 일이 있으면 가죽 장갑은 필수 준비물 1위였다. 박싱 데이 때 장만했던 자주색 레인 코트는 호시탐탐 입을 기회를 노리다가 여름과 겨울 사이 한국의 짧은 가을을 맞이하면 반드시 꺼내곤 했다.
확실히 추억이 깃든 물건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비싸게 주고 샀는지 여부를 떠나서, 심지어 주워 온 재활용품일지라도 상관 없었다. 다 먹은 코코아 유리병에 담긴 펜과 연필로 공부하던 교환학생 시절, 난데없는 빨간색시계가 존재감을 뿜어내던 책상과 그 위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일기를 쓰던 저녁. 애착을 가지고 사용하던 물건들은 그런 시간들을 기억 저편에서 불러온다.
어쩌면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소유물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인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더 높은 품질의 물건들을 얻기 위해 바쁘게 살지 않고, 대신에 그 시간을 보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눈을 하고서 본래의 목적에 더 집중하며 살아가는 편이 더 행복한 삶의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