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는 내가 외국인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현지인이었던 반면에 교환학생 시절에는 내가 외국인이었다. 영어 쓰는 사람들이 현지인이었고, 한국어 쓰는 나와 내 본교 친구들은 이방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런던에서 지낼 때는 외국인(그러니까, 말하자면 ‘현지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으면 더 고맙게 느껴졌다.
학기 초에는 ‘과연 내가 외국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만 해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외국인 친구들을 사귄 적이 딱히 없었다. 게다가 정식 입학한 학생도 아니고 잠시 머물다 떠날 교환학생인 내가 과연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싶었다.
다행히 수업을 들으면서 고민이 좀 해소되었다. 옆에 앉은 친구들이랑 말문을 텄더니 조금씩 친해질 수 있었다.
경영학 수업을 들으면서는 태국에서 온 친구 한 명과 아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오며가며 “안녕” 하고 인사만 하는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공강 때 학교 근처에서 같이 밥도 먹고 하면서 친해졌다. 보통은 브런스윅(Brunswick)이라는 나지막한 높이의 쇼핑센터에서 브런치나 국수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학교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비빔밥 카페가 있어서 같이 가기도 했다.
“음료도 하나 시키면 좋겠는데.”
“어떤 거 마시고 싶어?”
“글쎄. 혹시 여기서 가장 한국적인 차가 뭐야?”
“으음, 한국적인 차라면…….”
녹차도 아니고, 홍차는 더더욱 아니었다. 우롱차? 그건 정말 아니지.
결국 보리차로 골라 주었는데, 주문을 넣으면서도 왠지 친구를 본의 아니게 호구 맞히고 있지는 않은가 싶어져서 혼자 속으로 혼란스러웠다.
그 후로도 같이 테니스 라켓을 사러 간다거나, 타비스톡 플레이스(Tavistock Place) 근처의 호텔에서 친구 두 명을 더 불러다 애프터눈 티를 먹기도 하면서 같이 놀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함께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내가 이 친구의 시간을 빼앗고 있지는 않은지 괜히 염려가 되었다. 1년 후에 나는 런던에 더 이상 없을 텐데, '친한 친구를 만들어 두기 좋은 신입생 시기에 내가 끼어든 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러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딱히 할 필요 없는 걱정이었다. 내게도 친구들이 여럿 있었듯이 그 친구도 알아서 다른 친구들을 만들고 잘 지냈을 텐데, 일종의 '자의식 과잉' 같은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차라리 그런 걱정을 할 시간에 좀 더 같이 시간을 보냈다면 재미있는 추억들을 훨씬 많이 만들 수 있었는데' 싶은 후회가 들기도 한다.
한편, 내가 런던으로 교환학생을 가기도 전에 알게 된 친구도 한 명 있었다.
교환학생을 하러 떠난 시기는 2012년 중반 무렵이었다. 하지만 런던 생활이 첫 해외 체류 경험은 아니었다. 그 전에 학교에서 제공하는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이 있어서 홍콩에 한 달 반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문과대학에서 주홍콩대한민국총영사관으로 가는 인턴십 공고가 떴길래,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잽싸게 신청했었다. 딱 세 자리만 뽑았는데 운 좋게도 인턴십에 합격해서 잠깐이나마 홍콩 살이를 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 중국어를 공부할 때는 '이걸 어디다 써먹나' 했더니, 그게 여기서 빛을 발하는구나 싶었다. 역시 뭐든 배워두면 언젠가 다 쓸모가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세 명 뽑는 자리에 세 명만 지원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총영사관에 나를 포함한 본교의 세 명만 옹기종기 모여서 인턴십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페이스가 등장했다. 기억하기로는 홍콩계 영국인으로 나보다 나이는 한 살인가 많았는데, 이 쪽도 총영사관에 인턴십을 하러 왔다고 소개를 받았다.
“안녕!”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난 영국에서 왔어.”
“우리는 한국에서 왔어. 영국이면 런던에서 학교 다니는 거야?“
“응. 소아즈(SOAS)라는 대학인데, 혹시 알아?”
“어? 나 곧 있으면 거기로 교환학생 가.”
세상 좁다는 말이 진짜로구나 싶었다. 그 친구의 다른 친구들도 런던에서 살다가 방학을 맞아서 홍콩에 와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따금 만나서 같이 놀았는데, 하루는 리펄스 베이(Repulse Bay) 옆의 비교적 덜 유명한 해변에서 바다 수영을 하기도 했다.
그 날 해변에서 코즈웨이 베이(Causeway Bay)로 돌아오는 길에 탔던 버스가 아직도 기억 난다. 서울의 조그만 마을버스보다 좀 더 작고 덜컹이는 느낌이었는데, “이 버스 코즈웨이 베이 가나요?”하고 물었더니 기사님이 무심한 표정으로 버스 앞에 붙어 있던 행선지를 ‘코즈웨이 베이’로 바꾸셨다. 택시도 아니고 버스가 기사님 마음대로 행선지를 그때그때 바꿀 수 있다는 점에 한국인 인턴들은 물론이고 홍콩 친구들도 몹시 놀라워했다.
런던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아리 박람회가 열렸을 때도 홍콩 친구를 찾았다. 착하고 밝은 성격이라 인기가 많을 줄은 예상했지만, 가만 보니 동아리에서도 반장 혹은 총무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원 모집 부스에 서 있던 친구에게 다가가 물었다.
“안녕! 여기는 무슨 동아리야?”
“아, 안녕! 그냥 같이 모여서 밥 먹고 놀고 하는 동아리인데, 런던의 중국인 학생들 모임 같은 곳이야.”
“그래? 그럼 나는 안 되겠네…….”
“아니야, 괜찮아! 이제는 서구화(‘Westernised’라고 표현했다) 되어서 국적 상관 없이도 많이 들어오거든.”
그 말에 안심을 하고 입반 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친구와는 저녁에 따로 만나서 같이 놀자고 약속했다.
런던을 소개해 주겠다는 말에 친구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면서 시내의 중심지들을 산책했다. 과연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나 옥스퍼트 스트리트(Oxford Street) 같은 유명 쇼핑가들은 사람도 북적이고 상점도 많았다. 다행히 친구도 나도 걷기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녔다.
난도스(Nando’s)라는 치킨집에서 저녁을 먹고 주변을 더 둘러보는데, 웬 남성 한 명이 친구에게 어깨빵을 치고 자기 갈 길을 갔다. 어이가 없어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일상이라는 듯이 친구는 금방 표정을 풀고 다시 걸으면서 “런던 사람들은 보통 불친절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 친절한 사람도 많던데…….”
그러자 친구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해!”라며 주의를 주었다. 웃는 얼굴로 사기꾼 예방 교육을 단단히 시켜주는 친구의 모습이 살가우면서도 진지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쌀쌀한 날씨에 바깥에서 많이 돌아다닌 탓인지, 아니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준비한 동아리 행사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일정을 소화하느라 무리해서 그랬는지, 친구의 몸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쌩쌩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몸살 감기라도 걸린 듯이 영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다.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됐는데, 다음 날 연락을 해 보니 역시나 감기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같았다면 친구가 몸이 안 좋아 보이는 눈치일 때 강제로라도 집으로 보냈을 텐데, 그 때는 뭣도 모르고 ‘진짜 괜찮아!’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그런가…….’하고 받아들였다. 아프면서도 약속은 약속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동아리도 가입해줬는데, 런던이 처음일 이 친구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줘야지’라는 생각으로 꾹 참았을 친구를 생각하면 미안한 감정이 든다.
런던 사람들은 불친절하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중국 학생 모임 외에 음악 동아리에서도 친한 친구를 한 명 만날 수 있었다. 독일에서 온 학생으로, 나보다 나이는 어려도 항상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긍정적인 성격이라 함께 다니면 모든 게 괜찮아지는 듯 한 기분이 들곤 했다. 덕분에 ‘독일인은 무뚝뚝하고 유머 감각도 없다’라는 말을 익히 들어왔던 내 편견도 쉽게 깨졌다.
하루는 음악 동아리에서 파리 투어를 떠나기로 했다. 케일리(Ceilidh)라는 아일랜드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동아리였기에 가능한 이벤트였다. 오케스트라 동아리 같았으면 홀도 제대로 빌리고 그 많은 단원들 일정을 하나하나 조율해야 했을 텐데, 여기는 아무나 자기 할 줄 아는 악기 하나씩 들고 와서 연주하면 그만이었다.
동아리의 대장 같은 사람이 “몇 월 며칠, 파리의 분수 있는 삼거리에서 몇 시에 만납시다. 다들 어딘지 아시죠?”라고 구두로 공지를 띄웠고, 우리는 각자 알아서 해당 날짜에 파리에 도착해 서로 만나기로 했다.
보통은 웬만하면 한인민박 대신에 게스트하우스를 찾는 편인데, 그 때는 왠지 한인민박에 마음 편하게 묵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군데를 예약하고 나서, 독일인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숙소 정했어?”
“응. 한인민박으로 가려구. 너는?”
“그래? 나도 그럼 거기로 갈까나.”
“한인민박인데, 괜찮아? 게스트하우스가 나을 수도 있어.”
“뭐 어때.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은 걸?”
그래서 우리는 같은 숙소로 예약을 하고, 약속된 날짜에 오전 10시 쯤 파리의 리옹 역(Gare du Lyon)에서 만났다.
모임은 저녁이라 그 전까지 시간이 좀 비어 있었다. 우선은 숙소에 간단히 짐을 풀고 파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루브르도 구경하고 에끌레어도 사 먹으면서 파리 이곳저곳을 산책했다.
하지만 날씨가 다소 추웠던 탓에 얼마 못 다니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머리에 털모자를 써야 할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각자 침대에 앉아서, 서로 파리에 어떻게 왔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스위스 친구네 집에 있다가 기차 타고 바로 왔어.”
“그래? 나는 영국에서 배 타고 왔어.”
“배를 타고? 어떻게?”
“도버(Dover)에서 프랑스 칼레(Calais)까지 가는 배가 있거든. 대장이 ‘배 타고 갈 건데, 같이 갈 사람?’ 하고 물어보길래 합류했어.”
영국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간다니. 영국 하면 런던, 프랑스 하면 파리밖에 몰랐던 나로서는 꽤나 신선한 경로였다.
“완전 낭만적이다…….”
“낭만적이기는! 진짜 생고생이었어.”
“엥, 어째서?”
“야간에 배 타고 한참을 가는데, 제대로 잘 곳도 없었거든.“
“그럼 그냥 밤을 새서 온 거야?”
“말하자면 그렇지. 그 와중에 대장은 의자에 누워서 잘만 자더라구. 내가 당황해하고 있으니까 옆에 있던 친구가 ‘대장과의 여행은 처음이구나?’라고 했어.”
“자유로운 영혼이네.”
이야기를 듣고 다시 보니 친구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짐 정리를 좀 해야 하니까, 먼저 씻고 와서 빨리 한 숨 자고 있어”라며 낮잠을 부추겼다. 처음에는 ‘그럴까? 으음’ 하는 눈치였는데, 막상 씻고 와서 침대에 누웠을 때는 3초만에 잠이 들었다.
그 고생을 한 줄도 모르고 내가 눈치 없이 파리의 여기저기로 끌고 다닌 것만 같아서 괜히 미안해졌다. 다음 날 아침에 한인민박에서는 당연히 한식을 조식으로 차려주었는데, 미역국을 떠 먹으며 “음, 미역 수프라. 독특하고 맛있는데?”라고 눈을 빛내던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였으면 몰라도, 외국인 친구랑 같이 가게 되었으면 한인민박 예약을 취소한 다음에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봤어야 했다고 속으로 후회했다.
동아리 모임 일정은 첫 날은 저녁에, 이튿날은 낮에 잡혀 있었다. 그리고 셋째날은 각자 관광을 하다가 에펠탑 밑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심각한 길치였던 탓에 에펠탑에서 모이기로 한 일정에 늦고 말았다. 분명 조금만 걸어가면 닿을 것 처럼 가까워 보였는데, 사실 에펠탑은 파리의 어느 곳에서나 ‘조금만 가면 될 것 처럼’ 가까워 보이는 존재였음을 그 때는 몰랐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더니 친구만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너무 미안해서 연거푸 사과를 했는데, 친구는 오히려 내가 아니라 동아리 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었다.
“어떻게 사람을 그냥 버리고 갈 수 있어? 고등학생 때도 야외 활동이 종종 있었지만, 누가 좀 늦는다고 해서 휑하니 가버리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구!”
다행히 우리는 무리를 잘 따라잡아서 같이 일정을 소화하고 저녁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둘 다 잠이 오지 않아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마침 창 밖에서 관광객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바에 가서 칵테일이나 마시고 오지 않을래?”
그렇게 해서 한밤중에 밖으로 나가 술집 한 군데를 찾았다. 평소 여행을 다닐 때는 구글 맵으로 미리 어느 식당을 갈 지 사전에 다 찾아보고 갔었는데, 이렇게 동네 마실 나온 사람처럼 숙소 근처의 바에 들어서니 낯설고도 새로운 기분이었다.
시간도 많겠다, 우리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칵테일을 마셨다. 마치 대학교나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떠는 듯이 마음이 편했다. 학업이나 진로, 인간 관계처럼 평범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독일이든 한국이든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 그 독일인 친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국에 와서도 한동안은 페이스북으로 근황을 접하곤 했는데, 이제는 인스타그램이 대세가 되어서 소식이 아예 끊겨 버렸다. 야무진데다 성격도 서글서글했으니, 분명 어디서든 잘 지내고 있겠지?
다른 친구들의 근황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궁금해서 연락해봤어!’라고 하기에는 너무 뜬금없어 보일까봐 선뜻 연락처를 찾아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연락이 닿는다면, 추억팔이도 좀 하면서 ‘그 때는 고마웠고 미안했다’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덕분에 나는 런던에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잘 지내고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