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의동 에밀리 Oct 16. 2023

모르는 사람과도 정이 들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에서는 꼭 인사 해라."


시어머니께서 신신당부를 하셨다. 하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의 주민들은 엘리베이터에서 암묵적으로 서로를 모른 척 한다. 그러나 시댁 쪽은 상황이 정반대다. 엘리베이터만 타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인사를 건넨다.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시댁 쪽의 분위기가 더 좋다.




런던에서 교환학생으로 머물 적에는 기숙사에 살았다. 벽돌로 마감된 구축 기숙사였는데, 교환학생들과 학부생들, 특히 신입생들이 기숙사에 살았다. 2, 3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따로 룸메이트를 구한다든지 하면서 하나 둘 기숙사를 떠나가는 듯 했다. 


기숙사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가 계셨다. 산타 클로스가 연상되는 푸근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 동네의 기숙사는 보안이 무척 엄중해서 드나들 때마다 경비원에게 얼굴을 보여줘야 했다고 한다. 런던에서 지냈던 기숙사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키는 찍고 들어가야 했고, 경비 아저씨가 항상 문 옆에 앉아서 출입자들을 지켜보셨다. 


그랬기에 웬만해서는 경비 아저씨와 따로 말을 틀 일도 없었건만, 어느 날은 내가 부엌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단지 사과를 먹고 싶어서 과도로 껍질을 깎으며 조각을 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각, 사각, 사각……. 



인덕션이 신통찮았던 공용 부엌. 그 날은 식탁에 앉아서 사과를 깎았다.



'깎으면 사각거려서 사과인가?' 하는 몽상에 빠져들 즈음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과도의 끝 부분이 왼손 검지와 엄지 사이를 가리키도록 쥔 채 무리하게 사과를 썰려고 했다. 하지만 썰린 것은 사과가 아니라 내 손이었다.


껍질이 휑하니 벗겨진 사과를 한쪽에 팽개치고, 휴지로 상처를 꾹 누르며 지혈을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언젠가 들었던 괴담 같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소문 들었어? 교환학생 가서 첫날인가 둘째날인가에, 설거지 하다가 깨진 그릇 조각에 잘못 다쳐서 죽은 애가 있었대……."


그대로 연고와 밴드를 들고 경비실로 직행했다. 칼 끝이 피부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두 눈 똑똑히 봐버린 상태에서 괴담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뛰어가는 와중에, '이 정도로 심박수가 올라가면 피가 더 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또 했다.



위에서 내려다 본 기숙사 모습. 북쪽의 나무 있는 곳이 정문 방향인데, 구석의 기숙사 부엌에서부터 저기까지 뛰어갔다.



다행히 경비실에 아저씨가 계셨다. 학생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에 '이게 뭔 일인고?' 싶으셨는지, 놀란 표정으로 물으셨다. 


"도움이 필요한가요?"

"칼에 손이 베였어요."

"이런, 손을 심장보다 높이 들고 있어 보세요."

"아, 네……."


나는 얌전한 학생처럼 순순히 경비 아저씨의 말을 따랐다. 그런데 경비 아저씨가 구급상자를 가지러 사무실 뒤쪽으로 간 사이, 막상 다시 손을 보니 피가 멈춰 있었다. 


초등학생 때 양호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일화가 떠올랐다. 까불다가 심하게 다쳐서 양호실에 온 아이가 있었다. 엄마한테 들키면 호되게 혼날까봐 "부디 부모님께는 알리지 말아주세요"라고 간청하기에, 상처를 손으로 잘 오므리고 가만히 있으라고 이르셨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하교 무렵에는 그 큰 상처가 알아서 붙어 있었더라는 이야기였다. 


"어디 봐요. 음……. 피가 멈춘 것 같은데요? 여기 반창고만 붙이면 되겠네요."

"저기 그런데, 이걸 바르는 게 더 좋을까요?"

"이게 뭔가요?"

"코리안…… 연고랄까요." (후시딘이었다)


경비 아저씨는 내게 "일단은 피가 멈추는 게 우선이니, 반창고부터 붙이세요"라고 친절히 알려주셨다. 나는 밴드가 붙여진 손을 어깨 높이로 들고 한참을 서성이다가 방으로 돌아가서 사과를 마저 먹었다. 



사과 먹은 날 저녁에는 라면을 끓였다



돌이켜 보면 기숙사에 배정 받은 첫 날에도 같은 분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기숙사는 A부터 F동까지 있었으며, 각 동마다 4~5층 정도의 높이에 층마다 양옆으로 복도가 난 형태였다. 길다란 복도는 A와 B로 나뉘어서 각각 이쪽과 저쪽으로 뻗어 있었고, 복도에는 네다섯 개의 방과 공용 부엌이 있어서 이들이 하나의 플랫으로 묶였다. 


나는 E동에 배정을 받았다. 열쇠를 받아 들고,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9개월 분량의 살림살이를 질질 끌며 엘리베이터까지 갔다. 도저히 계단으로 낑낑대며 운반할 수 없는 무게였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춰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G층(한국의 1층을 영국은 G층이라고 불러서 한동안 헷갈렸다)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엘리베이터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자, 경비 아저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레이디, 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무슨 일인지 보고 오겠습니다"라며 계단으로 4층까지 뛰어갔다 오셨다. 


고장이 확실했던지, 경비 아저씨는 "이 쪽으로 오세요" 라며 나를 F동으로 안내해 주셨다. 캐리어도 무겁고 해서 걸음이 느렸던 탓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어디에서 오셨나요?"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이라……. 예전에 뱃사람 생활을 했었는데, 20년 전에 남한에 가 본 적이 있었어요."

"정말요?"

"예.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 부산항에 갔던 것 같네요."


그리고는 내가 머물 플랫의 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거기서 E동으로 갈 수 있도록 연결 통로의 문을 열어 주셨다. 영국은 역시 신사의 나라라는 말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숙사를 배정 받은 날 먹었던 저녁. 9월 말이었는데도 저녁에는 목도리를 할 정도로 추웠다.



그렇게 기숙사에 짐을 무사히 풀고, 교환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길도 익숙하지 않아서 도보로 등하교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전거 생활에 익숙해졌다. 유럽은 한국과는 달리 널찍한 대로보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난 골목길이 많아서, 자전거를 타고 살살 다니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나중에는 몇 시에 기숙사를 나서야 1교시 전까지 안전하게 학교에 도착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그리고 자전거로 학교에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그러면서도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 안전한 경로는 어디인지도 파악을 마쳤다. 


그런데 매일 아침 등교길마다 특정한 장소에서 잠시 멈췄다 가야 했다. 리전트 스퀘어(Regent Square) 부근이었던가? 신기하게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딱 그 시각에 그 장소에서 노부인 두 분을 마주쳤다.



구글에서 찾아본 뒷골목. 아마 이 근처였던 것 같다.



등교길 루트가 골목이었기는 해도 나름 횡단보도가 중간중간 있었고, 유럽에서는 행인이 차나 자전거보다 절대적으로 우선이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길을 건넌다고 하면 무조건 일단 멈춰야 했다. 그런데 아침마다 노부인 두 분이 딱 내가 그 골목을 지날 때 쯤에 횡단보도를 건너셨다. 그래서 나는 매번 자전거를 멈추고 그 분들이 길을 다 건널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의도치 않게 등교길마다 마주치다 보니, 차츰 그 분들에게 관심이 갔다. 아마도 근처에 사는 이웃이지 않을까 싶었다. 각자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뒤, 함께 공원으로 가서 아침 산책을 시키시려는 것 같았다. 강아지들도 노견인 듯 걸음이 느렸는데, 그 중 한 마리는 다리를 하나를 잃은 채였다. 절뚝거리면서도 묵묵히 주인을 따라 아침 일과에 나서는 강아지와, 그런 강아지를 애지중지 여기시는 작은 체구의 할머니, 그리고 오랜 친구 사이 같은 백발의 이웃이 푸근하게 느껴졌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 분들의 느린 걸음을 기다릴 때면, 나도 자전거에서 한 쪽 발을 페달에서 내리고 땅에 디딘 채로 한동안 머물렀다. 성격이 급해서 평소에는 뭐든지 와다다 해버리려는 타입인데, 어쩐지 그 시간은 하염없이 아름답게 느껴져서 미소가 지어졌다. 마지막으로 등교를 하던 날에도 두 노부인을 마주쳤고, 나는 그들이 길을 건너는 장면을 잊지 못하게 되리라고 직감했다. 




런던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골목들. 이 날은 동네 탐방을 나섰던 것 같다.



두 노부인은 아침마다 마주치던 작은 동양인 여자애를 혹시 알아채셨을까? 한 번도 이 쪽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는 일 없이 길을 건너셨지만, 어쩌면 공원에 다다라서야 "오늘도 그 여자애가 자전거를 탔어", "맞아 나도 봤지" 하고 이야기를 나누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20년 전에 남한에 와 봤었다는 경비 아저씨도, 작은 상처에 호들갑 떨던 한국인 여자애를 기억하고 계실까?


이름도 모르고 지냈던 그 분들의 안부가 오늘따라 궁금해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