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하는 사람들이 참 멋져 보인다.
음악은 별다른 장비 없이도 악기 하나만 있으면 평생을 가지고 놀 수 있고, 기량을 갈고 닦을수록 솜씨도 더 좋아지는 취미다. 비싸고 품질 좋은 악기라면 물론 더 섬세한 음을 표현할 수 있겠지만, 연주를 정말 잘 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저렴한 보급형 악기일지라도 손에 쥐기만 하면 곧장 예술가로 변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음악가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런던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오디션도 없고 악기 제한도 없다는 소개가 마음에 들었다. '이 실력으로도 뻔뻔하게 입단 신청서를 낼 수 있을까?' 하고 지레 머뭇거리게 되는 오케스트라 동아리보다 훨씬 내게 좋은 조건이었다.
동아리 이름은 '케일리(Ceilidh)'로, 아일랜드 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악기별로 연주해야 하는 악보가 조금씩 다른 오케스트라와는 달리, 동일한 악보를 놓고서 각자 할 줄 아는 악기를 가져와 함께 연주하는 형태였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보름달(Full Moon) 케일리'라는 행사를 열었다. 학교 강당이나 학생회관 같은 장소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동아리 부원들은 한켠에서 평소처럼 연주를 했고, 중앙의 넓은 공간에는 놀러 온 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만들거나 빙글빙글 돌기도 하면서 춤을 췄다. 시골 마을에서 축제가 열릴 때 다함께 출 것 같은 춤이었는데, 원래부터 그와 같은 반주 용도로 연주되던 음악이 케일리였다.
동아리에는 의문의 할아버지(?)가 한 명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학위 과정(박사인지 석사인지도 불분명하다)의 막바지 무렵에 논문 작성 대신 '신사적 협의(gentleman's league)'을 통해 학위를 수여하기를 요청한 이력도 있다고 했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교수들은 당연히 거절했기 때문에 학위를 못 받았다고 하던데, 진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날조한 소문인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독특한 사람이었다.
아무튼 동아리에서는 그 분이 대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래도 소아즈 학생은 맞았겠지?). 그러던 어느 연습일에는, "우리 이번에도 파리에서 공연을 하려고 하는데 말이죠"라고 운을 띄웠다. 파리에서 공연이라니? 또 상상 속의 제안인 건가?
하지만 파리 공연은 과거에도 진짜 있었던 행사였고, 조만간 파리로 건너간다는 말도 진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파리의 벨빌(Belleville)이라는 동네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공연 당일날 아침의 모임 장소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 Co.) 서점이었다. 시떼 섬(Île de la Cité) 옆에 있는 작은 책방으로, 영화 <비포 선셋>의 배경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자전적 에세이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는 서점 주인이 헤밍웨이에게 선의로 책을 빌려주기도 했다니, 꽤 오랫동안 지성인의 모임 장소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유명세에 비해 서점은 규모가 작았고 관광객도 많이 붐비지 않았다. 나는 친구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손님이 좀 있던 1층과는 달리 2층은 무척 한산했다. 대장과 동아리 멤버 한 명이 와 있었고, 모로코를 가기 위해 파리를 경유 중이라는 미국인 부부도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붉은 타일이 깔린 서점 바닥을 어슬렁거렸다.
나와 친구는 다른 부원들이 더 오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구석에 작은 피아노가 있어서 같이 건반을 눌러보기도 했다. 바이킹(Viking) 이라는 작가의 책(<The Heart of Matter>라는 처음 보는 책이었다)을 뒤적여보기도 했다. 몇 페이지 안 읽고 다시 덮었지만, 낡아 떨어지는 양장본이 멋졌다.
결국 더 이상 아무도 오지 않아서 네 명이 옹기종기 둘러 앉았다. 대장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밀튼(Milton)의 시집을 펼쳤다. 그리고는 시를 낭독했는데, 솔직히 영문과를 전공한 나였지만 학교에서 배운 시도 아니었고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해서 너무 졸렸다.
서점을 나와서는 대장이 즉흥적으로 “카타콤베를 가자” 하고 제안했다. 그런데 어떻게 가는지를 모르겠다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뜬금없이 펫샵의 쇼윈도에 정신이 팔려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ADHD급 리더십을 보며 속으로 ‘당신은 대장이잖아?’라고 생각했지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자유로운 영혼처럼 개인 관광을 하다가 오후의 공연 시간에나 합류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공연 장소라고 공지 받았던 벨빌이라는 동네는 흔히 내가 알고 있던 파리의 중심지와는 다소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벨빌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도 30분은 걸리는 동네였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오르세 박물관과 마레 지구를 구경하면서 여유롭게 놀고 있었다. 파리도 런던과 마찬가지로, 서울과는 달리 웬만하면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시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런던도 1존부터 9존까지 있고, 파리도 관광지만 있는 것이 아니었거늘. 카페에서 핫초코를 마시다가 왠지 좀 불안해서 구글 맵을 찾아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중간에 다른 길로 새지만 않으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 나오고 보니, 어둑어둑해진 벨빌이 살짝 무섭게 느껴졌다.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했던 관광 중심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생판 처음 와 본 동네인 데다, 어딘가 유럽의 차이나타운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로 일부 지역은 중국인 지구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글 맵이 알려준 대로만 쭈욱 걸어갔다. 다행히 약속한 장소인 식당이 나와서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식탁과 의자를 한켠으로 밀어놓아서 중앙 공간은 사람들이 춤을 출 만큼 충분히 넓었다. 케일리 사람들이 이미 꽤 많이 모여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도 있어서 그 옆에 자리를 잡고 플룻 케이스를 열었다.
하지만 연습을 나올 때마다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기에, 개중에는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도 있었다.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말을 걸고 한담을 나눴다.
"안녕하세요. 무슨 악기 연주하시나요?"
"저는, 이걸 가져왔어요."
"네……?"
그녀의 손에는 가리비 껍데기 한 쌍이 들려 있었다. 평소 조개구이 집에서 보던 가리비의 두 세 배는 되어 보이는 사이즈였다. 어디서 저런 걸 구했을까? 샀을까, 아니면 구워 먹고 깨끗이 씻었을까? 평소에 다른 악기는 연주하시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가리비가 본인의 메인 악기? 파리에 딱 하나만 챙겨온다면 '이거다!' 할 정도로? 그나저나 저 가리비가 정말 악기인가……?
나는 최대한 무례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놀라운 마음은 속으로만 꿀꺽 삼키고 대화를 이어갔다.
"호오. 이런 악기도 있었군요?"
"신기하죠? 이렇게 서로 스치면 소리가 나는 타악기랍니다."
그러더니 가리비 껍데기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껍데기 바깥 부분이 서로 맞부딪히며 스치게 했다. 마치 부싯돌로 마찰을 일으키는 듯 한 동작이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소리가 엄청 컸다. 몇 번 연속으로 들으면 귀가 아플 정도였다. 공연을 하다 보니 어느 새 나는 '부디 이번 곡에서는 몇 번 안 치기를……' 하고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이는 리코더를 가져와서 불었다. 바이올린과 기타가 난무하는 연주회에서 리코더라니 신선했다. 물론 가리비만큼의 임팩트는 없었지만, 그래도 학생 때 리코더를 불었던 추억이 떠올라서 대화를 나눴다.
"리코더를 연주하시는군요?"
"아, 네. 가지고 다니기도 편하고. 저는 이게 좋더라구요."
"그렇죠? 저도 리코더 좋아해요."
"플룻도 멋진걸요?"
"고마워요."
날렵해 보이는 작은 체구의, '소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나이를 몰랐기 때문에 정말 '소녀'였을 지는 모르지만, 손에 가벼운 리코더를 반짝 들고 호로록 연주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학창 시절에는 나만 리코더에 진심인 것 같아서 외로웠는데 드디어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공연이 진행되던 중, 막간을 이용해서 대장이 '소녀'를 무대 중앙으로 초청했다.
"여러분, 이 쪽은 국제 백파이프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신 분으로……."
국제 백파이프 대회? 1위?
나는 내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귀를 쫑긋 세우고 대장의 소개 인사를 들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정말로 굉장한 실력자인 모양이었다. "단독 연주를 한 번 들려드리겠다"라는 이야기와 함께, '소녀'는 어디선가 백파이프 통을 꺼내서 중앙으로 나갔다.
품에 껴안아야 할 정도로 큰 체크무늬 천 주머니에 막대기가 여럿 달려 있는 통이었다. 솔직히 달그락 거리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심장에 달린 뼈다귀 같아서 할로윈 해골이 연상되었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리코더를 다른 막대기들처럼 주머니에 푹 꽂고 연주를 시작했다.
신들린 듯한 연주를 들으며,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것인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국제 백파이프 대회 챔피언 같은 사람이 왜 이런 작은 음악 동아리에서 연주를 하고 있지? 게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랑 같이 합주를 하고 있었다. 오디션이 없다는 말에 쾌재를 부르며 들어온 아마추어의 바로 옆에서. 나는 대체 누구를 보면서 '리코더 동지'를 만난 기분을 느꼈던가…….
이튿날에는 오후에 다같이 카타콤베를 갔다. 아무래도 대장이 결국 카타콤베 가는 길을 찾지 못해서 다음 날 일정으로 미룬 모양이었다.
카타콤베에는 케일리 동아리 뿐만 아니라 ‘게릴라 합창단’ 사람들도 동행했다. 백파이프 소녀처럼 이 사람들도 아마 대장이 섭외한 듯 했는데, 산만하고 괴짜 같은 성격에 무슨 수로 이런 특별한 손님들을 초빙했는지 참 신기했다.
듣던 대로 카타콤베는 거대한 지하 무덤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좀 신경 써서 시신을 묻어둔 모습이었지만, 나중에는 두개골만 줄줄이 늘어놓는 등 사람 뼈가 장난스럽게 비치되어 있었다. 듣자 하니 후기로 갈수록 공간이 부족해져서 거의 처박아 놓는 수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행들이 나누던 대화에서, 뜬금없이 “노래할까?”, “그래” 하는 말들이 오가더니 몇몇이 합창을 시작했다. ‘게릴라 합창단’이라는 이름이 정말이었다. 줄지어 카타콤베를 구경하던 사람들 가운데 대여섯 명이 화음까지 넣어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었고, 어두운 조명이 비추는 동굴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니 근사했다.
아무 도구도 없이 단지 목소리만 가지고도 즉석에서 어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낭만적이었다.
카타콤베를 나와서는 식당에 들러 간단히 요깃거리를 했다. 같이 간 사람들 중에는 전날 밤에 봤던 백파이프 소녀도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메모장에 그 날의 흥미로웠던 일들을 간단하게 적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감탄하며 말했다.
“와, 이건 무슨 글자야? 한자?”
“아, 이건 한글이야.”
“한글? 신기하다…….”
내 눈에는 한자와 한글은 모양부터 전혀 다른 문자였기에 무척 생소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선행학습을 한 덕분에, ‘이것도 몰라?’ 하고 무례를 범하는 사태를 피했다. 며칠 전 스위스 친구네 집에 갔을 때, 친구가 쓰는 문자를 보고 비슷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 이건……. 아랍어야?”
“엥? 이건 페르시아어야.”
내 눈에 꼬불탕하게 보이는 글자는 모두 아랍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너무도 명확해 보이는 사실일지라도, 모르는 사람은 감조차 잡지 못할 수도 있다’라는 깨달음을 그 때 얻었다. 그랬는데도 막상 누군가가 나에게 한글을 보고 ‘한자야?’라고 물으니 기분이 묘했다. 당연히 모를 수 있는데. 이문화에 대한 오픈 마인드는 배워서 될 게 아니라 직접 겪어봐야 습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파이프 소녀는 음악과 관련된 본인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는데, 그 중에서 카타콤베 이야기가 특히 흥미로웠다. 어느 날인가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음악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했다. 서로 합주도 하면서 안면을 텄는데, 저녁 무렵이 되자 그 중 한 명이 이런 제안을 건넸다.
“우리는 카타콤베에 살고 있어. 놀러 올래?”
카타콤베에 산다니 의아했지만, 호기심이 의구심을 압도했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을 따라갔다. 그런데 일반 관광객들이 둘러보는 수준을 넘어서, 그들은 동굴의 더 깊은 안쪽으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파리에 살다 보니 카타콤베는 이전에도 와 봤지만 익히 알고 있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방대했다. 동굴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자칫 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탁 트인 공간으로 나왔다. 하늘이 뻥 뚫려 있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주 깊은 구덩이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그녀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밤새도록 음악을 연주하다 집에 돌아갔다고 했다.
“저도 사실은 ‘이러다 납치 당하는 건 아닐까’ 하고 살짝 걱정했지만, 착한 사람들이었어요.“
신원도 불분명한데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을 따라 지하 무덤으로 들어가다니. 무모해 보이면서도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인생의 낭만은 잘 짜여진 계획과 철두철미한 계산이 아닌, 그 사이사이 벌어진 틈새로 무방비하게 걸어가야 얻을 수 있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편으로는 그들이 착한 사람이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연주는 식당에서의 공연도, 카타콤베에서의 합창도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함께 한인민박에 묵게 된 독일인 친구와 지하철을 탔다. 저녁 시간인데 의외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악기며 악보, 보면대 같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있었던 터라 다행이었다.
“오늘 연주한 곡 중에, 콩그레스 세트(Congress Set)는 좀 빨랐던 것 같애.”
“그랬나? 근데 그거 원래 좀 빠르지 않아?”
“그치만 오늘은 너무 빨랐어. 바이올린으로 따라잡기 너무 어렵더라구.“
친구는 내심 아쉬운 눈치였다. 어쩌면 나는 ‘작은 실수 정도야 다른 악기 소리들에 묻히니 상관 없겠지’ 하는 마인드였던 반면, 친구는 원래 바이올린을 잘 켰기 때문에 ‘안 틀리고 속도를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여기서 버스킹 하지 않을래?”
친구는 “여기서?”라고 되물었지만, 우리는 어느 새 각자의 악기를 주섬주섬 꺼내고 있었다.
“악보는 내가 꺼낼게.”
어찌저찌 세팅을 마치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주를 시작했다. 지하철이 흔들거려서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보면대가 쓰러지려고 하면 손을 뻗어서 살짝 잡아주었다. ‘시끄럽다고 뭐라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들 흥미로운 눈과 미소 띤 표정으로 쳐다보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을 끄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내릴 때 박수 소리와 함께 '더 빨리, 더 빨리!'를 외치며 씩 웃기도 했다. 그 때가 한창 ‘지하철 버스킹’ 뉴스 같은 게 나오던 때라 다행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역에서 문이 열리자, 친구가 다급하게 “우리 여기서 내려야 돼!”하고 외쳤다. 분명 몇 정거장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연주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제대로 못 본 모양이었다. 짐을 제대로 챙길 새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악보며 플룻 케이스 같은 것들을 바깥으로 던졌다.
다행히 문이 닫히기 전에 가까스로 내렸다. 하지만 짐을 던지던 자세 그대로 플랫폼으로 돌진하는 바람에 둘 다 철푸덕 주저앉았다. 악보랑 악기는 널려 있지, 우리 스스로도 널브러져 있지……. 술도 안 마셨는데 엉망이 된 모습이 황당하고 어이 없어서, 서로를 바라보고 엄청 웃었다
나중에 런던으로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파리에서는 원칙적으로 지하철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게 불법이었다. 만약 연주를 하고 싶다면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벌금을 물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뉴스에 나오는 지하철 버스킹 영상 같은 것도, 사실은 불법적인 게릴라였거나 아니면 허가를 미리 받아 둔 계획적 공연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에 끌려가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과, 왠지 파리에서 사고를 쳐 놓고 런던으로 슬쩍 도망친 듯 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하지만 내심 '법규를 몰랐어서 다행이다'라는 철없는 마음도 솔직히 들었다. 그 때가 아니었으면 아마 파리의 지하철 버스킹 같은 것은 평생 부러워만 하고 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