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의 이동 시간이 좋다.
영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는 유럽에 온 김에 겸사겸사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우선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조금 있다가 영국 3국 투어를 떠났다. 런던에서 시작해서 더블린, 벨파스트, 에딘버러를 찍고 다시 런던으로 내려오는 루트였다.
런던에서 아일랜드로 떠날 때는 섬에서 섬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비행기를 탔다. 반면에 요크에서 런던으로 돌아올 때는 육로 이동이 가능했으므로 버스를 탔다.
하지만 버스로 장장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학생이라서 되도록이면 싼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수단이 바로 야간버스였다.
야간버스는 말 그대로 밤새 달려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버스였다. 에딘버러에서 출발할 때는 저녁이 지난 시각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버스 기사님이 마이크에 대고 짧게 안내 방송을 송출했다.
“아아. 안녕하세요. 저는 런던까지 여러분을 모셔 드릴 드라이버입니다. 부디 편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굿나잇.”
그러더니 “드르렁 쿨~” 하는 소리를 내는 기사님이었다. 아니, 당신은 굿나잇 하면 안 되시죠!
버스는 밤을 달렸다. 처음에는 도로도 그렇게 깜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버스가 달리는 도로도 점차 고속도로처럼 교외의 차도 느낌으로 변했고 주위도 완전히 어두컴컴해졌다. 그런데 한국과는 달리 영국의 외곽 고속도로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차들은 각자 자신의 헤드라이트에 의존해서 칠흑처럼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릴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헤드라이트 불빛만으로 충분할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남들도 다 그렇게 달리고 있으니 어느 새 나도 익숙해져서 마음을 놓았다.
어느 휴게소에 이르러서 버스가 잠시 정차했다. 잠에 취한 몇몇 승객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바람도 쐬고 몸도 풀어줄 겸 버스 밖으로 하차했다.
휴게소는 제법 커서 마트도 있었지만 그래도 으리으리한 정도는 아니었다. 간단히 과자 같은 것을 사서 나왔다.
바로 버스에 다시 오르기에는 아무래도 좀 갑갑했다. 바깥에서 밤공기를 잠깐 쐬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담요로 몸을 칭칭 휘감았다. 아주 한겨울처럼 춥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옷이 아주 따뜻하지도 않았다. 마치 수능 공부를 하다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친구들과 잠깐 건물 밖으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행히 일행 중에 한 명이 나처럼 잠깐이나마 바깥에 조금 더 있고 싶어했다. 밤이 엄청 캄캄했던데다 사실상 생판 모르는 남의 나라 시골 어느 휴게소에 있었기 때문에 혼자 있기에는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일행과 함께 버스 근처에서 멀뚱멀뚱 서서 시간을 때웠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담요 한 장만 대충 두르고 있자니, 어딘가 되는대로 외부환경에 맞대응하고 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필사적이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사는 것도 너무 항상 힘 주지 말고, 때로는 대강 아무렇게나 지내도 괜찮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따금은 이렇게 아무 것도 없고 어딘지도 모르겠는 곳에서 속 편하게 어두컴컴한 밤하늘이나 올려다보고 살아도 좋지 않을까.
그 때가 20대 초반이었는데, 본격적인 사회 생활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면서 왜 그런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을까? 아마 그 때는 그 때 나름대로, 외고 입시부터 시작해서 한 번도 가만히 멈춰 본 적이 없지 않았나 하고 어렴풋이 느꼈던 지도 모르겠다.
한밤중에 휴게소를 들렀던 그 날도 그렇고, 여행을 하다 보면 이동 수단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뭔가에 타고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 날아가는 비행기의 제트 엔진에 기름을 더 부을 수도 없었다. 열심히 달리는 기차에서 기관실에 쳐들어가 “3분 후에 나오는 코너에서는 속도를 줄여야 약 45초를 더 절약할 수 있어요!” 하고 훈수를 둘 수도 없었다. 그저 의자에 앉은 채로, 탈것이 성실하게 이동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뿐이었다.
바삐 서두르지 않아도 그럭저럭 뭔가가 달성된다는 사실이 어쩐지 아늑하게 느껴졌다. ‘내가 더 할 일이 정말 없단 말이지? 정말,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동 수단에서 늘 잠이 쉽게 들었다. 한 번은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가 착륙할 때 ‘쿵!’ 하는 충격에 깬 적도 있었다.
물론 비행기가 출발할 무렵에 느껴지는 묘한 감정이 좋아서 되도록이면 깨어 있으려고는 했다. 날아오르기 위해서 마구 달려가는 비행기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낄 때면, ‘달림’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써 ‘날아오름’을 성취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그리고 그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목표를 두고서도 ‘반드시’ 이루게 되어 있다는 자기예언적인 의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타고 오랜 시간을 이동해야 할 때면 언제나 다소 아늑한 기분에 빠져들고는 했다. 특히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사실 비행기는 공중에 떠 있는데다 바깥 풍경도 대체로 온통 구름 뿐이기 때문에 왠지 내가 다른 세계에 동떨어져 있는 듯 비현실감이 들었다. 일관되게 ‘우웅-’하는 소음도 왠지 인위적으로 들렸다.
반면에 기차를 타면 창 밖으로 일상적인 풍경이 흘러갔다. ‘여기 사람들은 저렇게 생긴 집에 사는구나’, ‘애들 미끄럼틀이 있는 걸로 봐서 근처에 학교도 있나 보네’, ‘저 마트는 장사가 잘 될까’ 하는 시시콜콜한 상상을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Bruxelles)에서 근교의 브뤼헤(Brugge)로 당일치기를 다녀올 때도 기차를 탔다.
그 날은 아침에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브뤼헤로 가는 기차 있나요?”라고 물었는데, 매표소 직원이 ‘브뤼헤’를 못 알아듣길래 가이드북을 펼쳐서 원어 표기를 가리켰다. 그제야 “아~ 있죠 있죠” 하고 왕복 표를 끊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전광판을 봤는데도 브뤼헤로 가는 기차를 도저히 찾지 못해 역무원에게 물었다.
“저기, 브뤼헤로 가려면 몇 번 플랫폼에서 타야 하나요?”
“아, 거기라면 저 쪽 4번 플랫폼에서 11시 기차를 타시면 된답니다.“
이번에는 표를 보여주며 물었더니 단박에 의사소통이 되었다. 내가 타야 했던 기차는 종착역이 브뤼헤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광판에서 찾기 힘들었고, 역무원은 친절하게도 표에 역 이름과 플랫폼까지 손수 적어주었다.
11시까지는 30분이 남아서 그냥저냥 시간을 때웠다.
4월 초였는데도 눈이 오는 날이었다. 바깥은 무척 추웠는데 기차 안은 따뜻했다. 나는 몽롱한 상태가 되어서 브뤼헤로 가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구경했다. 눈이 내리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집들은 야트막하고, 땅은 넓고…….
브뤼헤에 도착해서도 아기자기한 마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목도리와 장갑으로 꽁꽁 싸매고 다녀야 할 정도로 추웠지만, 그 와중에 벨기에 사람들이 자주 먹는다는 감자튀김을 한 주먹 사서 먹으며 돌아다녔다. ‘이 나라 사람들이 양념감자를 맛보면 좋아하겠는걸’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백조가 많아서 유명하다는 ‘사랑의 호수’와 깨끗하고 차분한 느낌의 미술관 등을 천천히 구경했다.
브뤼셀로 돌아와서는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 직원의 추천 메뉴를 맥주와 함께 먹었다. 이미 브뤼헤 역사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자판기에서 1유로 짜리 코코아를 뽑아 마셨지만, 저녁이 되니 역시 배가 고파졌다.
추천 메뉴는 감자와 시금치, 그리고 매시 포테이토처럼 잘게 썬 고기와 갈색 소스를 곁들인 쇠고기가 나왔다. 1인분 치고는 양이 무척 많았지만 웬일인지 접시를 싹싹 비웠다. 친절한 종업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쪽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던 모닥불 때문이었을까? 하루종일 추운 데서 돌아다니다가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에 들어오니 밥도 더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빠르고 편안하게 이동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저렴한 표와 이동 수단을 구해서 다녔던 학생 때의 여행이 그리워진다.
그 중에서도 라이언에어의 저가 항공기, 그것도 제일 싼 표를 타겠다고 새벽부터 길을 나섰던 이탈리아행이 유난히 떠오른다. 개트윅 공항으로 새벽 3시에 출발하는 이지버스를 타겠다며 기숙사 근처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205번 나이트 버스를 기다렸다가 탔다. 냄새 나는 이지버스를 참아내며 공항에 도착해서는 새벽 6시 15분에 이륙하는 비행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도착한 로마는 아름답고 따뜻했다.
그 때는 친구들이랑 혼수상태로 공항에서 시간을 때우며 “다시는 이런 표는 끊지 않아야지” 하고 다짐했는데. 그런데도 그 때가 추억처럼 떠오른다. 정말 시간이 지나면 뭐든 다 아름답게 기억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