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은 공부를 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외국에 갔으면, 그리고 교환학생이라는 신분을 획득했다면 더욱 '공부'와는 담을 쌓아야 마땅하다는 견해가 대세였다. 한국에서도 늘상 할 수 있는, 게다가 '해야 했던' 게 학업인데, 비행기 타고 멀리까지 가서 고작 공부에 시간을 쏟아버리면 시간이 아깝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나는 궁금했다. 외국 대학에서는 애들이 어떻게 공부를 할까? 한국에서처럼 닭장 같은 독서실에 칸칸이 자리 잡고 앉아서 문제집을 풀고 깜지를 쓸까? 주입식으로 가르치고 객관식으로 평가하는 한국의 교육 방식과는 달리 서구권에서는 고등학교 입시부터 논술 일체로 치른다는데, 대학에서는 어떻게 학업을 이어갈까?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언제 또 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될 지도 알 수 없는데, 그런 기회를 날려버리면 아깝지 않을까?
다행히 존경하는 대학 선배 중에 나와 같은 학교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언니가 있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교환학생 가면 다들 공부는 안 하나요?"
"왜?"
"여행 다니고 친구들 사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들어서요."
"자기 하기 나름이지. 하려고만 하면 다 할 수 있어."
그 말에 결심했다.
교환학생을 가면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도 사귀고, 그 모든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공부까지 해보겠다고.
우연의 일치였을까?
런던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어찌된 일인지 나는 대학원생 기숙사로 배정을 받았다. 기숙사를 신청할 때 특별히 무슨 선택지를 고른 것도 아니고, 내가 대학원생으로서 교환학생을 간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방에 짐을 풀고 부엌에서 플랫메이트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던 중에 알게 되었다.
"어? 학부생이었어?"
"네."
"희한하네. 여긴 대학원생 동인데. 대학원생들은 조용한 데서 공부하라고 일부러 모아 놓거든."
"헉, 어쩌죠? 저 여기 있어도 되려나요?"
"뭐 어때. 잘못한 것도 아니고."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나를 대학원생 플랫에 배치한 이유가 없지는 않았으리라는 의심이 든다. 왜냐하면 내 방은 옆 동 주방과 얇은 벽만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그 쪽에서 파티를 열면 이 쪽은 소음에 매우 취약했다.
실제로 학부생들 기숙사는 대학원생 동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인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교환학생을 같이 갔던 본교 친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우리 쪽 플랫에는 한 방에 두 명이 자는 여자애도 있어."
"남친이라도 데려오는 거야?"
"아니, 둘 다 여자애야. 심지어 한 명은 자기 기숙사 방이 따로 있는데도 매트리스를 들고 왔더라구."
"대체 왜?"
"몰라. 둘이 완전 친한가봐. 지난번에 어쩌다 놀러갔는데 마약 냄새 나는 것 같았어."
물론 심각한 일탈은 일부 날라리 학부생들만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큰 돈을 내고 최대한 단기간 내로 학위를 취득해야 하는 대학원생만큼 절박한 공부를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반면에 내가 지내던 플랫은 간간히 들리는 통화 소리만 빼면 거의 절간 같았다.
하루는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테스코(TESCO)에서 마트 표 컵케이크 한 팩을 사왔다. '간식 먹으면서 텍스트나 좀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프린트물을 들고 주방에 갔다. 그런데 주방에는 이미 노르웨이인 플랫메이트가 있었다.
"안녕."
"안녕, 뭐 하고 있었어?"
"어제 레포트 하나 제출했거든. 마음 편해져서 소설책 좀 읽으려구."
항상 생글생글하고 차분한 성격이라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대학원생으로 교환학생을 왔는데, 때때로 아보카도를 먹다가 씨를 채취했다며 플라스틱 컵에 심기도 하는 등 엉뚱하고 다정다감한 면이 있었다.
"잘 됐다. 컵케이크 먹을 건데, 2개 들어 있거든. 하나 먹을래?"
"정말? 고마워."
주방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서 간식을 먹었다. 둘 다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고 조용히 자기 몫의 읽을거리를 훑어 내려갔다. 창밖으로는 런던의 오후가 노을지고 있었다. 컵케이크가 한 팩에 2개씩 들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런던의 대학에서는 학기별로 수강신청을 하지 않고 1년 단위로 했다.
학기제도 한국과 상이했는데, 한국은 봄학기와 가을학기 2개로 나뉘는 반면 영국에서는 1, 2, 3학기로 나눴다. 9월부터 시작하는 1학기와 2학기에는 수업을 듣고, 비교적 짧은 3학기에는 시험을 치르는 형태였다.
수업은 0.5학점인 반 년 짜리 수업과 1년을 통틀어 진행되는 1학점 수업으로 나뉘었다. 1년에 총 4학점을 들을 수 있으니, 1학점만으로 채우면 4개, 0.5학점만으로는 8개를 이론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이론적으로'라는 말을 쓴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3학기' 때문이었다. 1학점이든 0.5학점이든 시험은 죄다 3학기에 몰아서 봐야 했다. 따라서 0.5학점 수업 8개를 신청한 사람은 그 죄로 시험 8개를 한꺼번에 치러야 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0.5학점과 1학점을 적절히 섞기도 하고, 아니면 차라리 1학점만으로 4개만 달랑 듣는 경우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영국까지 갔는데 서너 수업만 듣고 오기가 아까웠다. 내가 언제 또 런던에 와서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할 수 있을 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1학점 수업은 1개만 신청하고, 0.5학점으로 5개를 들었다. 다 더하면 3.5 학점이라 4학점을 꽉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직전 학기에 본교에서 7과목 씩이나 들으면서 비축분을 만들어 뒀으니 이번 기회에 조금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과목들은 크게 네 종류였다. 우선은 소아즈(SOAS)라는 학교는 개발학(Development Studies)으로 유명하다고 하니, 시험 삼아 1개 과목을 담았다. 다음으로는 평소에 공부하고 싶었던 예술 분야를 골랐는데, 그 중에서도 '해외에서 한국을 배우면 어떤 느낌일까?'가 궁금해서 한국 예술 과목을 2개 담았다.
마지막으로는 '그래도 전공 학점을 어느 정도는 따 놓아야 제때 졸업을 하겠다' 싶어서 학점 채우기 용도로 몇 개를 선택했다. 본전공인 영문학 전공으로 인정 가능한 과목은 언어학 수업들을 담았다. 이중전공인 경영학 전공과목으로 인정되는 수업도 찾아봤는데, 너무 뻔해 보이는 경영학 기초 과목들은 패스하고 그래도 흥미로워 보이는 중국 경영(Management in China) 수업을 신청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발학과 의미론은 다소 배드 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개발학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수업이어서 진입장벽부터가 높았다. 읽어 오라고 받은 텍스트를 훑어봤는데 제목들이 죄다 의문형이었다.
'ILO(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는 실효성이 있는가?'
'기업들은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소아즈(SOAS) 대학은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라는 이름에 맞게, 과거 대영제국 시절 동양과 아프리카 쪽을 탐구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라고 들었다. 그래서 식민지들을 어떻게 하면 잘 개발할까 하는 문제를 많이 연구했고, 자연스럽게 경제와 노동 관련 학문이 발달했다고 한다. 플랫에서 만난 한국인 언니도 개발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들을 비교해보고 소아즈를 선택해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었다.
물론 학교의 역사를 어디서 읽어서 아는 게 아니라 전부 다 전해 들은 이야기라 일부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대영 박물관(The British Museum)이 코앞에 있는 학교라 충분히 그럴 만 해 보였다. 이집트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유물들을 가져다 놓은 거대한 박물관이 떡하니 있으니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야심차게 도전한 개발학 수업은 초짜인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학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마르크스와 쌍벽인 존재로 거론이 되었고, 그런 지식들을 학생들은 상식처럼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또 하루는 교수님이 자꾸 'the south'라고 뭔가를 지칭하시길래 수업 시간 내내 '갑자기 웬 남쪽?'이라며 고개만 갸우뚱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 개발학 전공 중인 대학원생 언니에게 물어봤다.
"교수님이 'the south'라고 하시던데 혹시 무슨 뜻인지 아세요?"
"아, 개발도상국 말씀하시는 거야."
"영어사전에는 'developing country'라고 나오던데요?"
"사실은 그게 어폐가 있는 표현이거든."
이후에도 여러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자본주의가 부만 창출하는 게 아니라 빈곤도 동시에 만든다는 사고방식도 신선했다. 어쩐지 수업이 '노동 빈곤층 문제 (Issues of the Working Poor)'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한국에서 경영학을 배웠던 내게는 새로운 관점이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주워들었건만, 결국에는 중도 하차를 했던 것 같다. 몇 번 들었던 수업 풍경 외에는 남아 있는 기억이 없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성적표까지 뒤져봤는데 개발학 수업은 흔적도 없었다. 역시 드랍으로 끝났던 걸까? 아니면 마음만 중도 하차를 하고, 성적표에서 어찌저찌 지워 버렸나? (그게 가능한가?)
개발학은 그래도 재미는 있었던 반면, 언어학 수업은 재미도 없고 적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정한 배드 엔딩이었다.
하지만 중국 경영이나 한국 미술 관련 수업은 모두 흥미로웠다.
특히 중국 경영(Management in China) 시간에는 서양 국가에서 동아시아에 대한 시각을 엿본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내 기준으로는 한국이 모국이고 중국과 일본이 이웃 나라인데, 영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국이든 중국이든 저 멀리 극동아시아에 있는 이국적인 땅으로 매한가지였다.
중국에서는 기업을 어떻게 경영하는지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는 내용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중국 바로 옆에 자리한 나라에서 살아왔건만 바다 건너 저 멀리 있는 영국 사람들보다 훨씬 중국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 '당'의 위상이 어떠한지, 석유 회사 같은 국영 기업은 어떤 존재인지 등에 대해서 듣게 되어 흥미로웠다.
수업 방식도 독특했다. 수업 듣는 시간과 세미나 토론하는 시간이 번갈아 있었다. 세미나 토론 때는 사전에 읽어 오기로 한 자료를 토대로 튜터 한 명의 주관 하에 학생들끼리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그 중 한 학생이 중국에 대해 굉장히 해박해서 놀라웠다. 완전히 영국식 발음을 쓰는 친구인데다 중국계 같지도 않았는데 (차별적인 발언인가?), 중국의 사정을 어쩜 저리 잘 알고 있담?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어서 하루는 말을 걸어 봤다.
"혹시 중국에서 살다 왔어? 어떻게 이렇게 중국을 잘 알아?"
"아니, 그냥 따로 공부를 좀 해서. 너는 중국인이야?"
"응? 아니. 한국인이야."
"아 진짜? 그런데 왜 중국 수업을 들어? 한국 수업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만 질문하려고 했는데, 뜻밖의 역습에 대답을 우물거렸다.
'듣고 보니 그러네. 나는 왜 한국인이면서 중국 수업을 신청했지? 한국인이라면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경쟁력을 키우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나? 일리가 있는 멘트였어…….'
만약 그 때로 돌아간다면, 지금은 대답할 멘트가 있다. "나는 그래서 한국 쪽 수업도 듣고 있어"라고 말이다. 1학기와 2학기 각각 0.5학점씩 한국 미술 수업을 신청했으니까.
예술 분야라면 오래 전부터 한 번쯤은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게다가 영국에서 한국에 대해 배우는 경험을 해 본다니 흥미롭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수업은 마치 테드(TED) 강연을 듣는 듯 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금발의 영국인 교수님이셨는데, 특히 1학기 때는 한국의 왕실 예술에 대해 배우면서 나도 몰랐던 한국인의 무의식과 한국의 이모저모를 알 수 있었다. 언젠가는 조선시대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면서 학생들에게 이런 설명을 해주신 적도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전통'이라고 하면 조선시대를 떠올려요. 보통 한국인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대한 지식이 조선시대에 비해 적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고요. 게다가 일제강점기로 인해 한국이 조각조각 나버렸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그 직전 시기인 조선시대를 전통적인 시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하시고는 내 쪽을 바라보고 물으셨다.
"어, 지금 한국 학생들이 보고 있긴 한데……. 맞죠……?"
대답은 못하고 살살 웃기만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되뇌었다. '선생님, 그건 저도 몰랐던 사실인데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아요…….'
이렇듯 난이도와는 상관 없이 대체로 평화롭고 행복하게 학업에 열중하며 교환학생 시기를 보낼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역시 '하고 싶은 공부'를 골라서 했다는 사실이 가장 주요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예컨대 나는 예술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서양의 시각에서 동양을, 그리고 외부의 시선에서 나를 한 번쯤 바라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진학이나 취업 같은 실리적인 목표와는 전혀 무관한 욕망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따랐고, 배우고 싶은 학문을 선택해서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은,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카페 유리문에 비친 나를 우연히 마주했었다. 런던 날씨에 맞게 코트와 부츠 차림을 하고 미술 수업을 듣다가 귀가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잔잔한 행복감이 마음 안쪽에서 맴돌았다.
그 동안은 수능 점수에 맞춰서 영문학과를 가고, 취업 용도로 제격이라는 말에 경영학을 이중전공으로 선택하는 등 목적에 따라서 결정의 기준을 잡곤 했다. 하지만 교환학생 때 만큼은 '해야 할 것 같은'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유는 몰라도 런던에 있을 때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고 싶었고, 또 그래야만 할 것 같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도 나는 내가 그 때 스스로의 직관을 따랐던 일을 아주 잘 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런던까지 가서 '나중에 귀국하면 취업은 어떻게 하지? 졸업에 유리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지?' 따위를 걱정하며 지내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인생의 축소판을 살고 왔던 것 같기도 하다.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를 어떻게 채워갈 지 고민하며 결정하고 실행해 나가는 시간이었다. 다만 실제 인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어진 시간이 소진된 후에 과거를 되돌아 볼 수 있느냐의 차이가 있었다.
교환학생을 통해서 한 번의 '짧은 인생'을 살아보았고, 덕분에 그보다 더 '긴 인생'을 보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나침반을 하나 얻은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