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를 만들었다.
날씨가 흐리멍텅해서인지 기분도 착 가라앉는 날이었다. 요리는 자기효능감을 올려주는 데에 직빵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라서 주방 찬장을 열어보았다. 파스타 건면이 눈에 들어왔다. 마트에 가서 크림소스 봉지를 사다가 면은 살살 삶아서 크림을 부어 볶아 주었다. 똑같은 면요리인데도 컵라면보다 훨씬 근사했다. 마음이 좋아졌다.
영국은, 특히 런던은 물가가 살인적이라고 익히 이야기는 들어 왔었다. 하지만 사람은 겪어 봐야 진짜로 깨닫는 법인지라, 교환학생을 가서 지내보니 '아 이게 이 정도였어?!' 하고 체감이 되었다.
어디 외식을 가면 무조건 인당 1.5만원 이상이었다. 하다못해 샌드위치 한 조각도 비쌌고, 심지어 학생식당 밥도 한국 물가에 비하면 저렴한 편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학생회관 식당에서 반찬 하나가 200~300원을 하곤 했다. 그래서 누가 학생식당에서 5,000원 이상 썼다고 하면 "대체 뭘 먹은 거야?"라고 놀라곤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저그런 볶음밥 한 그릇도 몇 천원이 기본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학교 근처 샌드위치 가게나 학생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곤 했다. 한 번은 도서관 앞에 피자 자판기가 있어서 호기심에 사 먹었다. 마치 커피 자판기처럼 원하는 피자를 선택했더니 그 커다란 기계의 투명한 유리 안쪽에서 피자 도우가 데워지는 모습이 보여서 신기했다. 맛도 나쁜 편은 아니었고, 운 좋게 땅바닥에서 0.5파운드 동전을 주워서 물까지 사 먹었다.
하지만 역시 매 끼니를 사 먹기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웠다. 한국에서는 학교 근처 밥집을 가거나 엄마표 집밥을 편하게 먹기만 했는데, 런던에서는 요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한국에서 가져간 1인용 밥솥이 있었다. 게다가 런던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학교 근처에 한인 마트가 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지도에서 검색해 보니 학교에서 걸어가면 바로 닿는 거리였다.
잽싸게 찾아가 보니 김치, 고추장, 한국 과자 같은 공산품은 물론이고 삼겹살이나 두부, 한국식 쌀까지 있을 물건은 다 있었다. 그 후로는 식재료가 떨어질 즈음이면 한인 마트나 학교 가는 길에 있던 웨이트로즈(Waitrose)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잔뜩 사다가 자전거 바구니에 싣고 오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모든 교환학생 동기들이 밥솥까지 챙겨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중 한 친구는 아직 한국에서 부모님이 추가로 부쳐주신 짐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아직 후라이팬 같은 조리도구도 장만하기 전이었어서 제대로 밥을 해 먹고 있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친구를 우리 쪽 부엌으로 초대했다.
"내가 밥 지어 줄게."
"정말? 그래도 돼?"
"응, 힘든 일도 아닌 걸."
쌀을 씻어서 1인용 밥솥에 보글보글 밥을 짓고, 오징어채며 김치, 김 같은 정말 기본적인 찬거리들을 꺼냈다. 숟가락과 젓가락도 놓아 주고, 친구가 밥 먹는 모습을 식탁 반대편에 앉아서 바라봤다.
"정말 나 혼자 먹어도 돼?"
"응. 난 아까 먹었어."
"고마워……."
다른 사람에게 밥 한 끼를 챙겨 준다는 게 이렇게 마음 편하고 기분 좋은 일인지 그 전까지는 몰랐었다. 그냥 평소에 먹던 대로 별 것도 아닌 상을 차려줬을 뿐이었는데. 희한하게 그 때를 떠올리면 마치 잔잔한 일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느리게 가고, 나는 딱히 할 일 없이 앉아서 친구랑 두런두런 수다를 떨고, 창 밖으로는 하늘에 구름이 떠 가고.
밥을 많이 해 먹었다고 했는데, 사실 나는 평소에 해외 여행을 가면 현지 음식을 먹고 한식은 쳐다도 안 보는 편이었다. 비행기 타고 가서까지 삼겹살과 김치찌개를 찾을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집에 있는 편이 낫다는 주의였다. 길어야 일주일인 해외 여행, 매 끼니 횟수를 다 합하더라도 몇 번 없는 식사 기회인데 그 때 현지식을 먹지 않으면 시간도 돈도 아까울 것 같았다.
하지만 짧은 여행이 아니라 아주 살아보려고 갔더니 아무래도 한식이 가장 편하고 입에도 맞았다. 파스타를 해 먹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같이 면과 빵으로 연명하기에는 한국인은 정말 '밥심'이라는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는 게 분명했다.
자연스럽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한인 마트를 들러서 장을 봤다. 순두부찌개도 끓여 먹고, 호박전도 부치고 나물도 무쳤다. 한국에서는 평생 라면 한 봉지 안 끓이고 분식집만 들락거렸는데, 런던에서는 학기중이면 점심 때마저 꼬박꼬박 기숙사까지 자전거 타고 와서 기어이 된장찌개를 끓이고 밥을 지어 먹었다.
놀랍게도 그 쬐끄만 1인용 밥솥은 밥을 20분 만에 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덕분에 갓 지은 밥을 후딱 먹고 다시 수업을 들으러 학교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밥솥을 쇠숟가락으로 긁어대면 금방 내솥 코팅이 벗겨진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귀찮기도 하고 누가 보는 것도 아니어서 굳이 밥공기에 주걱으로 밥을 덜지 않고 솥째 퍼먹었는데, 귀국할 무렵에는 밑바닥이 박박 긁혀서 여기저기 자잘한 흠집이 많이 나 있었다.
남들도 이렇게 요리를 해 먹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나 다들 외식은 진작에 포기하고 집밥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주방에 갔더니, 같은 플랫에 살던 한국인 언니가 냄비에 온갖 재료를 넣고서 비닐장갑 낀 손으로 조물조물 뭔가 반죽하고 있었다.
"뭐 만드세요?"
"응, 동그랑땡 먹고 싶어서."
한국인 유학생들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이것저것 만들어 먹기는 매한가지였다. 플랫메이트 중에 덴마크에서 온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은 부엌에 갔더니 그 친구가 뜬금없이 "케이크 구웠는데 먹을래?"라고 물어왔다.
"진짜 나 먹어도 돼?"
"그럼."
"고마워, 잘 먹을게!"
한 조각을 받아서 기숙사 방에 들어와 냠냠 먹었다. 어디 가서 팔아도 될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한 케이크였다. 케이크나 쿠키는 빵집에서나 사먹을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터라 신기했다. '이걸 이렇게 집에서 그냥 구울 수 있는 거였어?'라며 혼자 조용히 놀라워했다.
때로는 친구들이랑 같이 모여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한국인 친구들이랑 같이 모일 때 내가 가장 자신 있게 선보였던 메뉴는 그저 평범한 삼겹살이었다. 고기 사와다가 구우면 끝인데, 그게 타향살이하던 그 때는 그렇게 맛있었다.
물론 조리 방법이 조금 다르기는 했다. 기숙사 부엌에는 오븐이 있어서, 넓은 사각 팬을 하나 사다가 그 위에 삼겹살을 구우니 기름이 쪽 빠지고 거의 수육처럼 담백한 맛이 났다.
나중에는 차츰 여러가지 '코리안 가니쉬'를 추가했다. 마성의 엘릭서를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되는 양송이부터 시작해서, 양파나 감자 같은 것도 곁들여서 구웠다. 소스로는 쌈장을 어떻게든 구했지만 적상추는 도저히 구할 곳이 없어서 로메인으로 대체했는데, 세상에 로메인이 쌈채소로 그렇게 탁월한 야채인 줄은 처음 알았다.
그 밖에 만들어 먹었던 특이한 메뉴로는 '에그 누들' 요리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파는 가게를 아직 찾지 못했는데, 희한하게 런던에서는 에그 누들을 마트에서 곧잘 팔았다. 노란 빛을 띠는 둥지처럼 생긴 건면으로, 아마 계란을 많이 넣고 반죽해서 뽑은 면 같았다.
에그 누들은 런던으로 교환학생을 가기 전에 홍콩에서 잠깐 지낼 때 식당에서 처음 먹어봤다. 여러가지 메뉴를 주문했고 그 중에 에그누들 둥지 두 개가 구워진 상태로 같이 나왔다. '이것은 무슨 요리인고' 하며 그 구운 면을 젓가락으로 오독오독 조각내어 소스를 찍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과자 같은 식감에 고소한 맛이 소스와 어우러져서 기가 막혔다. 같이 나왔던 스테이크보다 그 소박한 '구운 면'이 더 인상적이었다.
참으로 인상 깊은 에그 누들이었건만 한국에서는 도통 만나지를 못하던 차에 런던 마트에서 마주치니 무척 반가웠다. 일단 사고 나서, 부엌에 식재료를 풀어 놓고 '이걸 어떻게 요리할까?'를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그냥 둥지 째로 후라이팬에 굽고 칠리소스만 얹어봤는데도 꽤 맛있었다.
그 후로 에그 누들을 삶아서 청경채 넣고 탕면으로도 해 먹고, 굴 소스 뿌려서 볶아 먹기도 했다. 의외로 모든 조리법이 맛있었다. 내 입맛이 이상한가 싶어서 친구들에게도 슬쩍 요리해 줬더니, "이거 뭐야 진짜 맛있어!"라는 평가를 받아서 뿌듯했다.
영국에는 참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사실은 런던의 마트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에그 누들은 물론이고 온갖 식재료가 다 있었다. 쌀부터도 종류가 다양했다. 길쭉하고 찰기가 없어서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바스마티 쌀(Basmati rice)도 있고, 한국의 찰기 있는 쌀과 아주 흡사한 (사실은 동일한 거였나?) 일본의 스시 쌀(Sushi rice)도 있었다. 인도 커리 종류는 또 어찌나 그리 많던지. 아마도 100년 후 쯤이면 영국의 전통 음식으로 카레가 등극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중에는 아예 밀키트로 나온 팩도 있었다. 친구들이랑 모여서 저녁을 먹자고 했던 어느 날에는 팟타이 밀키트가 눈에 띄었다. 뒷면에 나온 조리법을 읽어 보니 대강 면 삶아서 이것저것 재료 넣고 볶으면 되는 쉬운 요리였다. 덴마크 친구가 케이크를 구워줬던 날처럼, 이 때도 '이걸 이렇게 그냥 집에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거였어?'하고 속으로 조용히 놀라워했다.
집에 와서 만들어 보니 정말 조리법대로 쉬웠다. 간단한 요리를 하는데 조리도구 여러 개 쓰면서 설거지 늘리는 게 싫어서 냄비 하나로 면 삶기부터 볶기까지 다 해치웠다. 그러느라 중간중간 냄비를 빠르게 씻어서 다시 불 위에 올리고 했더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가 "이것이 아시아의 저력인가? (Asian efficiency!)"라고 감탄했다.
반면에 유부녀가 된 지금은 어느 새 요리는 내가, 설거지는 남편이 하는 식으로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그 탓에 조리도구를 비교적 개의치 않고 쓰고 있으니, 사람 마음이란 게 이처럼 몹시 간사하다…….
한국인은 기본 인사 표현이 "밥 먹었어?"와 "밥 한 번 먹자!"인데, 그만큼 식사는 다른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런던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 친구들을 불러서 뭔가를 만들어 먹는 일이 한국에서보다 훨씬 많았는데, 그 때마다 한결 더 친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하루는 일본인 친구가 "나 떡볶이 알아!"라고 하길래 신나서 한 솥을 끓여봤더니만, 그 다음 날 배탈이 났다고 연락이 왔다. 어쩐지 매워 보이는데도 "쓰흡, 별로 안 맵네! 괜찮아!"라고 계속 먹는 모습이 걱정됐었는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또 하루는 플랫메이트들과 서로 자기 나라 음식을 요리하는 저녁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나는 고기도 좀 들어가고 하는 음식이 좋겠다 싶어서 닭도리탕을 만들었다. 그런데 끓이면서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한국인 기준으로는 하나도 안 맵지만 외국인이 먹으면 탈이 나는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됐다. 그 때 마침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뭐 만들어?"
"응, 이거 한국식 닭 스튜 같은 건데……. 혹시 매운 거 잘 먹어?"
그랬더니 친구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뭔소리야? 나 인도인이야."
아 참, 같은 아시아였지만 인도는 좀 달랐지.
그래서 귀국한 이후로도 요리를 곧잘 해먹었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시 밖에 나가서 사 먹거나 집밥을 얻어 먹는 일상으로 바로 복귀했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혼자 살 때도 가끔씩만 해먹었다. 2~3인분이면 몰라도 1인분만 딱 만들기에는 식재료를 장만하기 보다 차라리 그때그때 사 먹는 편이 더 경제적이고 시간도 덜 들었다.
하지만 런던에서 살던 때를 떠올리면, 마트에서 뭔가를 사와서 직접 해 먹던 기억들이 오히려 어디 맛집을 가서 사 먹었던 때보다 더 추억처럼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그저 한 끼를 때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음식에 정성을 들이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는 종종 집밥을 해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