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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Apr 30. 2024

산후조리원 vs 산후도우미

1개월 3일

과거로 돌아가면 산후조리원을 가지 말아야지. 


신생아 아기를 키우면서 정말 여러 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연분만(유도분만)을 했기에,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2박 3일은 산부인과 입원실에서 보냈다. 퇴원 후에는 산후조리원으로 직행했다. 마침 산후조리원은 산부인과 코앞이었다. 그래서 집에 들르지도 않고 병원에 가져간 짐가방을 그대로 싸들고 입소를 했다. 


돌이켜보면, 산후조리원 시스템에 대해서 모르는 채로 계약을 하고, 모르는 채로 입소를 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병원-조리원-산후도우미 순서를 밟았기에 별 생각 없이 따랐다. 심지어 맘카페 같은 데에서 누군가가 “산후조리원 대신에 집에서 조리해도 괜찮을까요?”라고 올리는 질문에는 ‘당연히 조리원을 가야 하지 않나? 집에서 갓난쟁이를 어떻게 보지?’라고도 생각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막상 산후조리원에 들어가 보니, 일단 갓난아기를 신생아실에 맡기는 것부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었던 아기였다. 그런데 산부인과에서는 낳자마자 신생아실로 가서 내가 하루 두 세 번 정도 ‘면회’를 하러 갈 수 있었다. 면회라면 감옥에서 수감자를 찾아가는 일에 쓰이던 용어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조리원에 갔더니 또 내 아기가 신생아실로 갔다.


하루 온종일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품었던 아기가, 낳자마자 ‘디폴트가 떨어져 있는’ 상태로 전환되었다. 그 때는 무슨 기분이었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낯섦’이었다. 




내 아기인데,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되나?


하지만 나는 신생아를 돌보는 방법에 무지했다. 기저귀 가는 법부터 시작해서 적절한 수유량과 자세까지, 모두 배워야 했다. 모르다 보니 무서웠다. 아이가 긴급한 신호를 보내는데도 내가 못 알아채면 어쩌지? 먹은 것을 게워냈다가 기도가 막힌다거나, 하여튼 어떤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는데 내가 미흡하게 대처해서 아이가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그러니까 전문가들에게 케어를 맡겨야 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나는 아직 아이를 케어할 능력이 안 된다고, 그러니 아이와 붙어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생아실에 아이를 맡기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은 한편으로는 ‘아이에게는 내가 필요 없어’, ‘아이는 나와 떨어져 있는 편이 나아’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강화시켰다. 


머리로는 아이를 위해 전문가들에게 케어를 맡기자고 생각했으면서, 아이와 떨어져 지낼수록 마음은 불안했다. 신생아실에는 아이가 여러 명이었는데, 간호사 수는 아이 수와 1:1이 될 정도로 많지 않았다. 실시간 영상으로 아이 모습을 볼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당장 손길이 필요한 상황인데 간호사 선생님들이 바빠서 미처 발견하지 못하셨으면 어쩌지?


한편으로는 자신감도 떨어져갔다. 조리원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나는 아이 돌보는 방법을 모르던 사람에서 아이를 ‘서툴게 돌보는’ 사람으로 변해갔을 뿐이었다. 여전히 아이가 몇 시간마다 밥을 먹는지, 한 번에 몇 ml를 먹는지, 대소변은 얼마 간격으로 보는지, 아이의 배고픈 신호와 불편한 신호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목욕과 대변 씻기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유튜브에서 ‘24시간 모자동실’의 개념을 접했다. 


하루 두 번 있는 모자동실 시간도 벅찰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렵은 초초초 신생아 시기라서 거의 먹고 자기만 할 뿐이지 안아달라며 보채는 일도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생후 3주차부터는 요구사항이 많아지기 때문에 산후조리원에서는 보통 2주까지만 받는다고도 한다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초보자용 아기’ 단계인데도 불구하고, 나랑 있을 때 아기가 잘못될까봐 전전긍긍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24시간 모자동실이라니? 그러면 산후‘조리’의 의미가 없지 않나, 너무 가혹하지 않나 싶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24시간 모자동실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내가 양육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간과하고 있었지만, 출산을 한 시점부터 ‘임신’은 ‘육아’ 상태로 곧장 바뀌었다. 그 사이에 끼어들 중간 단계는 없었다. 뱃속에 있든 세상에 나오든 둘 중 하나이니, 출산을 하면 당장 내 손길이 필요한 아이가 세상에 짠 하고 태어나는 셈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의식중에 ‘출산은 했지만 육아는 좀 나중에 하고 싶다’라는, 보호자로서 다소 무책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보호자로서의 의무를 떠나서, 모유 수유 측면에서도 아이를 반드시 곁에 끼고 살아야 했다. 


사실 나는 모유가 아기에게 좋다는 말은 들어왔지만, 그건 그저 ‘토마토가 암 예방에 좋답니다’ 정도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랑 교대로 수유하면서 양육을 분담할 겸 완전히 분유만 수유해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그러다 출산 후에 뒤늦게 알고 보니, 모유가 면역이나 영양 측면에서 분유보다 월등히 좋다는 의학적인 데이터가 너무, 정말 너무 많았다. 


하지만 산후조리원에서는 기본값이 분유였다. 물론 산모가 원하면 수유콜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수유콜이라는 게, 아이가 배고파서 보채면 산모에게 ‘모유수유 하시도록 아기 데리고 방으로 올라갈까요?’하고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배고플 때 바로 젖을 물리지 못하니, 아이가 밥을 먹을 때 쯤에는 이미 울다 지친 상태고, 산모는 산모대로 아이가 배고파하는 신호를 알아채는 법을 조리원 퇴소날까지 모른다. 


나는 처음에 완분을 생각했다가 모유수유에 욕심이 난 케이스였지만, 한편으로는 회음부가 너무 부어서 도넛방석을 가지고도 제대로 앉아 있지 못했다. 서서 하든 무릎 꿇고 침대에 기대어 하든, 하여튼 모유수유를 하려면 이상한 자세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한 번 수유할 때마다 몸 어딘가가 아팠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수유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산후조리원에서 24시간 모자동실을 하며 모유수유를 한다고 한다. 물론 극히 드문 케이스라서 브이로그 같은 데서나 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면 산후조리원이 무슨 소용이냐”라는 말을 듣는다던데, 어쨌든 조리원에서 청소, 빨래, 밥을 다 해결해 주니까 모유수유와 회복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한다. 아이 잘 때 같이 자고, 아이가 깨면 젖만 물리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여담이지만, ‘젖만 물리면 되니까 24시간 모자동실 하면서 모유수유 하세요’라는 말도 사실은 현실이랑 조금 동떨어져 있지 않나 싶다. 아이의 요구는 밥 말고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밥 때문에 1시간마다 깬다면 (모유는 소화가 잘 돼서 1~2시간마다 수유해야 한다고 한다), “기저귀 갈아주세요”, “똥 쌌으니 물로 씻겨주세요”, “속싸개가 풀렸으니 다시 싸주세요” 등으로 중간중간 또 깨야 한다. 그리고 아이 잘 때 같이 잔다면 산모(=환자)로서 8시간 정도의 수면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미지수다. 미숙한 초산모로서 아이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샤워하고 밥 먹고 육아 관련된 정부지원사업도 알아보는 등의 다른 일들도 해야 하는걸. 


아무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완벽하게 24시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사지 시간 등을 제외하면 되도록 계속 데리고 있으려고 노력했다. 완전모유수유로 성공하기에는 이미 젖병에 익숙한 아이라 어려웠지만, 아이와 같이 지내면서 육아에도 익숙해지고 신생아실의 단체생활에서 빼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가 밤 늦게 녹초가 되어서야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신생아실에 아이를 맡기러 갔다. 그러면 간호사 선생님들이 “오늘 하루종일 데리고 있었네요, 고생하셨어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24시간은 아니니까, 말하자면 ‘12시간 모자동실’ 같은 것을 하며 깨달은 점이 있었다. 초산모는 아무래도 조금 힘들겠다는 점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더 엄격해졌다고 하는데, 산후조리원에는 보호자 1인만 동반으로 투숙(?)할 수 있었다. 외출은 보호자는 물론이고 산모도 제한적이라, 병원을 다녀오거나 할 때 외출증을 끊어서 조리원장 사인을 받아야 했다. 보호자의 상시적인 출퇴근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나 같은 경우에는 남편이 주말에만 와서 지내고 평일에는 회사 다니느라 집에 있었기 때문에 이산가족이 되었다.


면회도 안 되고, 외부인 출입은 더더욱 안 되고, 보호자 교체도 안 되고. 그러다 보니 평일에는 모자동실 시간에 아이와 단둘이만 남아 있었다. 남편이랑 같이 입소해서 사흘 정도 있을 때는그래도 기댈 구석이 있었는데, 오롯이 혼자 아이를 케어해야 한다는 사실은 경험 없고 산전교육도 안 받았던 초산모로서 부담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12시간 모자동실을 하려다 보니, 조리원 스케줄이랑 안 맞을 때는 더 난처했다. 조리원이라는 단체 생활에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이를 케어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해서 시간을 보내기란 어려웠다. 청소 시간에는 방을 비워서 라운지에 가 있든지 하고, 마사지 시간에는 아이를 신생아실에 맡기고, 밥과 간식은 아이가 배고픈 시간과 상관 없이 정해진 시각에 나왔다.


밥을 먹다가 수유를 하거나 혹은 수유를 하다가 밥이 오는 때가 많아서, 식은 밥을 먹거나 허겁지겁 식사를 끝내기도 했다. ‘의무 모자동실’ 시간에는 방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있었기에, 신생아를 놔두고 화장실이든 좌욕이든 짧게라도 자리를 비우기가 겁이 났다. 


마사지 시간이 수유텀과 겹칠 때도, 모유수유를 하지 못하고 아이를 신생아실에 맡겨야 했다.나는 임신 기간에 6kg 정도 밖에 찌지 않아서 딱히 마사지로 몸의 붓기를 빼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이미 지불한 마사지 값이 아까우니 취소할 수도 없었다. 내 몸이 이렇게 안 부을 줄은 몰랐기에, ‘마사지가 대수인가, 모유수유를 해야 하는데…’ 라면서 괜히 선결제를 왕창 했다는 생각이 퇴소날까지 계속 들었다. 




아이를 잠깐 맡아줄 곳은 신생아실 뿐이었다.


신생아실 간호사 선생님들은 경력이 대단한 전문가 분들이셨지만, 신생아실에 아이를 맡길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가 그 곳에서 지내는 동안 젖병을 물고 유두혼동이 심해질 것을, 그리고 나는 모유수유 기회를 놓쳐서 젖양이 아이의 요구량을 따라가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했다. 


너무 과식을 하게 되지는 않을지도 걱정되었다. 물론 신생아실에서는 아기들마다 차트를 만들어서 수유, 배변, 목욕, 영양제 등을 꼼꼼하게 시간대별로 기록했다. 수유하기 직전에는 반드시 차트를 확인해서 언제 얼마나 먹었는지 보면서 아직 밥 때가 되지 않았는지를 체크했다. 그래도 신생아실은 아무래도 아기가 많다 보니, 한 명이 울어서 다른 아이들까지 울지 않도록 일단 젖병을 입에 물려서 잠재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를 단체생활하는 곳에 떠맡겼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특히 밤이 되면 그런 죄책감이 더 심해졌다. 내가 자다가 아이가 사레 들리거나 하는 것도 못 알아챌까봐 두려워서 신생아실에 맡기고 왔었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도 아이가 잘 지낼지 신경이 계속 쓰여서 잠이 오지 않았다.스마트폰 앱으로 실시간 영상을 봐도 괜히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처음에는 불편한 마음을 눌러가며 꾸역꾸역 잠을 청하다가 새벽 2~3시를 넘기곤 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결국 나중 가서는 새벽에도 아이를 보러 신생아실에 내려가서 유리창 너머로 한동안 아이 얼굴을 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서,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숨을 죽여가며 울었다. 




아이를 혼자 보거나 신생아실에 맡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미숙한 나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이와 혼자 방에 있더라도 때로는 신생아실에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었다. 새 분유가 필요해요, 수유 자세를 알려주세요, 아이가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등등. 그럴 때마다 간호사 선생님 한 분이 올라와서 도움을 주셨지만, 뻔히 바빠 보이는 신생아실에 늘상 1:1 케어를 요청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다들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만사 제쳐놓고 바로 달려와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가 옆에 늘 있어주어서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아이 케어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조리원에서는 겨우 기저귀 갈고 옷 매무새 고쳐주는 일 정도만 할 수 있었다. 똥기저귀를 갈아줄 때도 물티슈로 대변을 살살 닦아내어 새 기저귀로 갈아준 다음에 신생아실로 데려오면 물로 씻겨준다는 안내를 받았고, 목욕 시키기 같은 것은 진짜로 딱 한 번 곁에서 ‘보기만’ 할 수 있었다.


퇴소 날까지도 나는 여전히 아무 것도 못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퇴소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계속 맴돌았다. 산후도우미는 퇴소 다음날부터 오시도록 서비스를 신청했기에, 당장 퇴소 날 오후부터 밤까지 남편이랑 잘 버틸(?) 수 있을지부터가 막막했다. 




아무리 산후조리원에서 모자동실 시간에 아이와 지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집에 오면 모든 것이 리셋이었다. 


젖병과 유축 깔대기도 스스로 관리해야 했고, 어디에 앉아서 어느 쿠션을 깔고 수유를 할 지, 아이는 낮과 밤에 어디에 눕혀두고 무슨 옷을 입혀야 할 지,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까지 처음부터 다 정해야 했다. 육아용품을 놓을 곳도 다시 동선에 맞게 배치해야 하는데, 그 동선조차 아직 하나도 잡힌 게 없는, 생후 첫 날과 다름 없는 미숙한 상태였다. 


예상대로 조리원 퇴소 첫 날은 난장판이었다. 아이는 계속 울어대는데, 이게 배고픈 신호인지 뭔지 알지를 못해서 남편이랑 둘이 우왕좌왕했다. 수유텀과 회당 수유량 같은 게 어땠는지 궁금해서 조리원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이의 차트를 줄 수는 없고 대신에 최근 며칠간의 일별 수유량이나 적절한 회당 수유량을 알려줄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른 아기들 차트도 아니고 내 아기의 차트인데, 왜 공유가 어려울까. 그러고보니 모자동실 시간에 두어 번 왈칵왈칵 토를 했었다. 블로그를 쓰는 지금 돌이켜보면, 집에 온 이후로는 아기가 때때로 게워내기는 해도 그런 토를 한 적은 없었기도 하고…….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산후도우미님과 함께 아이의 생활패턴과 상태를 처음부터 파악하기 시작했다. 


산후도우미님은 아이를 케어하러 집안 여기저기를 다니시면서, 더 필요한 물건은 무엇인지, 어떤 물건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등을 이야기 해주셨다. 얘기를 듣고 보니 우리집에는 천기저귀도 없었고 (천기저귀를 ‘기저귀’로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로션과 바디워시도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고, 아기옷은 아직 세탁 안 한 것도 많이 있었다.


모유수유를 원하지만 조리원에서 완분->완모로 마음이 바뀐 탓에 혼합수유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수유 시간마다 옆에 붙어서 자세와 마사지를 도와주셨다. 그렇게 30분을 수유한 다음에는 적정량의 분유를 타서 아이에게 먹여주셨다. 조리원에서는 간혹 가다가 받았던 도움을 상시적으로, 1:1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졌다. 




집에서 산후도우미 서비스를 받으면서는, 하나하나를 옆에서 지켜보고 또 배우기도 하면서 마음이 차츰 놓여갔다. 


옷 갈아입히는 것부터 목욕을 시키는 일까지, 눈 앞에서 보면서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고 배우다 보니 ‘나도 저렇게 하면 되겠구나’ 싶어졌다. 한편으로는 어디 태열 올라온 것은 없는지도 확인하고, 아이가 울 때는 어떻게 달래지는지, 안을 때는 어떻게 안아주면 편안해하는지도 체크해 주셨다. 조리원에서는 한 명의 전문가가 3~4명의 신생아를 케어했다면, 집에서는 한 명의 숙련공과 한두 명의 미숙련공(나와 남편)이 단 한 명의 신생아를 케어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밖에도 육아와 관련해서 내가 궁금했던 여쭤보기도 하고, 산후도우미님께서 알고 계시는 육아 지식도 알려주셔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수유량과 수유텀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앞으로 원더윅스는 언제쯤 올 것이고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지, 태열 올라왔을 때는 어떻게 하고, 이 동네에 산모들이 추천하는 소아과는 어디가 있는지, 등등. 


꼭 산후도우미 서비스 뿐만 아니라, 집에 있으니 남편도 친정 부모님도 볼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했다. 조리원을 ‘호화로운 감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집에 오고 나니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이해가 됐다. 더 이상 혼자서 아이에게 미안해하며 울고 있지 않아도 되었다. 


‘내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에도 마음이 놓였다. 조리원에서 제공하는 원피스가 아니라 (산후풍으로 다리가 시려운데 어째서…) 내 옷을 입었다. 아이를 뱃속에 품었을 때 그대로의 침대에 눕고, 익숙한 거실에 앉아서 수유를 했다. 아이도 더 이상 유니폼같은 조리원 배냇저고리와 두꺼운 속싸개가 아니라, 아이 아빠가 직접 고른 예쁜 옷을 입고, 낮에는 자유롭게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놀다가 밤에는 스와들업을 입고 잠을 청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성향이 다 다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조리원에서의 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침(?) 회음부가 특히 많이 부어있었기에 조리원에서 몸 회복을 잘 할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성능 좋은 좌욕기를 하루 네 번씩 쓰고, 산부인과가 코앞이라는 접근성도 외래 진료 보러 가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되기는 했다. 집이었다면 좌욕기 물 받느라 끽해야 하루 두 번 좌욕하고, 마사지샵에서 “이 정도 압력으로도 아프시면 외래 진료 보시는 게 좋겠어요”라는 말도 못 들었을 테니 ‘원래 다 이렇게 아픈가보다’ 하고 외래 진료도 안 갔겠지…….


그래도 과거로 돌아간다면 조리원보다는 산후도우미 서비스에 비용을 몰빵하고 싶다. 그것도 24시간 입주 서비스로 고용해야지. 밤이고 낮이고 도움을 받으면서 한 달을 지내고, 한 2주 정도는 주말에도 사람을 써서 계속 도움을 받아야지. 임신 초기에는 산후도우미라고 하면 평일 주간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있을 서비스는 다 있었다. 


아참, 그리고 마사지는 굳이 처음부터 선결제할 필요 없이, 진짜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출장마사지를 부르거나 동네 마사지샵을 잠깐 다녀와야지. 대신에 서울시에서 하는 모유수유 지원사업을 일찌감치 신청해서 초장에 자세를 잘 잡아야지. 그치만 역시 회음부가 찢어져 있었으니까 이러나 저러나 어려웠으려나?


그러면서 남편이나 친정 엄마랑 얘기도 많이 하면서 우울감을 털어내고, 불안해 할 시간에 집안을 내 마음대로 정리하면서 생산적으로 지내야지. 아이를 신생아실에 내맡기지 않고, 거실이든 어디든 내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마음 편하게 있어야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VIP 추가금을 냈기 때문에, 혹은 내가 운이 좋아서 산후도우미 분이 잘 맞는 분과 매칭되어서 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조리원은 내 성격상 그다지 상성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맡겼으면 마음 편하고 몸 편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직접 해낼 수 있게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어쩔 수 없었던가 싶다. 실제로도 내 주위에는 조리원이 천국이었다고 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으니까.


나중에 누군가가 산후조리원과 산후도우미를 고민한다면 이 글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 사진 출처 : Unsplah의 Kelly Sikk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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