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입동』
「입동」은 '모름'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에는 한 부부와 아이가 나오고 아이가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부부는 더러워진 벽에 새로 도배를 해야 한다. 벽이 더러워진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남편의 어머니가 복분자액을 터뜨린 과거로 들어간다. 복분자액이 폭발해 벽지를 더럽히자 아내는 시어머니에게 상스러운 말을 내뱉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시간은 한 번 더 과거로 들어간다. 가장 깊숙한 과거에는 부부가 어떻게 이사를 오게 되었고 어떤 마음으로 집을 사고 꾸몄는지에 대한 '정착'의 과정이 드러난다. 이후 그들의 아이가 어떻게 목숨을 잃었는지가 이야기된다. 시간은 현재-과거-대과거-과거-현재의 순서로 진행된다. 즉, 소설은 중반부까지 아이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숨기는데 이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이 소설을 단순히 유가족의 슬픔과 절망에 대한 보고서로 읽지 않았으면 하는 작가의 바람이다.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는 채로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자칫 독자는 드라마의 관성으로 인해 '이런 종류의 이야기일거야'라는 식의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소설이 무엇을 의도하든 결국 죽음과 상실이 동반하는 상투적인 플롯과 감정에 신경을 뺏기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이 구성은 독자의 무지를 부추긴다. 독자는 남편의 서술이 왜 불안한 느낌을 가지는 지, 아내가 왜 시어머니에게 막말을 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 소설을 읽게 된다. 보험설계사인 남편과 노량진 고시원 총무인 아내의 모습은 김애란의 전작들 속 인물들의 전형과 일치한다. 남의 집을 전전하고 떠돌던 인물들이 계절을 돌고 돌아 「입동」까지 오면서 드디어 자기 명의의 집과 손수 꾸민 가구들과 아직 한글도 깨치지 못한 어린 아이를 얻은 걸지도 모른다. 그 아슬아슬한 정착의 서사가 아이의 죽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멈추어 선다. 집이란 어떤 건지, 가구란 어떤 건지, 아이는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알고 아이의 죽음에 직면한다. 그제야 독자는 남편의 서술과 아내의 행동이 어떤 배경에서 발생하고 있는지를 이해한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지만.
「입동」이 이러한 구성을 통해서 의도하는 바는 이 '착각'에 있다. 안다고 여기는 모름. 이 소설이 '세월호'라는 강력한 알레고리에 묶여있는 것은 자명하다. 김애란이 세월호를 바라보면서 주목했던 것은 '고통에 대한 무지'였다고 본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가 일명 '꽃매'라고 불리는 폭력으로 변하여 유가족을 죄인으로 만들었던 일련의 흐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입동」에는 세 가지 모름이 있다.
하나는 폭력의 모름. 이 소설 상에서는 부부를 피하고 사건에 대해 수군거리는 동네 사람들이다. 폭력은 슬픔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모름이라는 타자성과 슬픔을 전염병처럼 여기는 혐오에서 온다. 무지한 타인은 당사자가 느끼는 슬픔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어 자의적으로 '이제 됐으니 그만 울라'고 말한다. 혹은 유가족의 보상액수를 관찰하거나 떠들어대기도 한다. 폭력은 타인의 고통에 무지하고 그것에 대한 관심을 거둘 때 발생한다.
둘은 독자의 모름이다. 위에서 말했듯 독자는 가장 핵심적 사건인 죽음에 대해 모르는 상태로 소설에 진입하고 나중에야 깨닫는다. 그래서 「입동」은 처음 읽을 때 보다 두 번째 읽을 때 더 불행하고 슬픈 소설이 된다. 독자는 마치 부부의 운명을 알아버린 (그러나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불운한 예연가처럼 그들이 어떻게 아이를 잃고, 어떤 마음으로 집을 사고 꾸미고 그 작고 연약한 '정착'이라는 걸 만들려 했는지를 다시 본다.
셋은 작가의 모름이다. 「입동」은 정교한 상징물로 짜여져 있다. 정착을 상징하는 올리브 색 벽지와 이를 훼손하는 (사고를 낸 어린이 집에서 보낸) 복분자액, 그리고 훼손을 복원하는 도배. 도배를 트라우마의 극복행위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소설 말미에 부부가 도배를 시작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귀결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 부부는 꽃무니 벽지(꽃매를 상징하는)를 바르던 와중에 가구 뒤에서 이름도 쓸 줄 모르던 아들 '영우'가 쓰다만 글씨를 발견한다. 아내는 주저앉아 울고 남편 역시 고개를 떨어뜨린 채로 벽지를 들고 서있다.
아내가 주저앉은 채로 '다른 사람들은 몰라'라고 말할 때 그의 고통은 김애란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어떤 소설적 해결이나 결말을 거부하는 선언으로도 들린다. 거기서 소설은 멈춘다. 작가는 울고 있는 아내와 벌서듯 바들바들 떠는 남편을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소설을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다. 작가도, 독자도, 그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모름의 영역이 우리를 멈춰 세운다. 대신 작가와 독자는 그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을 뚜렷하게 바라본다.
이 소설이 강력히 일깨운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의 외부자라는 것. 단지 모른다는 사실이 잘못하지도 않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이 세계를 냉혹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 저 두 사람에게서 왠지 모르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면, 이 소설이 나도 모르게 나를 울렸다면, 지금은 이 소설이 멈춘 곳에, 겨울이 다가오는 곳에 같이 서서 곁에 있자. 어쩌면 우리는 그저 '모르고 있음을 앎'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