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바깥은 여름』
소설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심정은 대개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가 새롭게 발견한 인식과 공간에 대한 설레임, 혹은 전작을 답습하고 매너리즘을 극복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초조함이다. 「비행운」 이후 김애란의 다음 소설집을 기다릴 대 정확히 반반의 감정을 나눠가졌던 것 같다.
김애란의 소설은 보통 실패하지 않는다. 그 힘은 견고하고 유려한 문장력에서 나온다. 그의 문장은 유연하면서 힘이 있고 아름다우면서도 통찰력이 가득하다. 그러나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이 어느 정도 작가의 한계를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300페이지 상당의 소설을 이끌어갔던 것은 서사의 강단보다는 그의 장기인 비유와 상징, 호흡과 리듬이었다. 물론 김애란의 서사가 절대 약한 것은 아니다. 그의 주요 서사는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파편화 혹은 해체된, 흩어진 모양의 가족들, 또는 가족에서 떨어져 나간 자취생, 고시원의 생태계. 김애란의 장점은 이런 최전방의 현실을 묘사하면서도 특유의 문장력과 총체성을 포착하는 관찰력으로 그만의 판타지를 형성해 낸다는 것이다. 등단작 「노크하지 않는 집」의 기괴함,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 맞부딪치는 시선들의 그로테스크, 「달려라 아비」 속 달려가는 아빠 다리의 이미지 등등. 현실과 현실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스파크를 불꽃놀이로 만들어 미적 공간으로 쏘아 올리는 것이 김애란의 소설 세계이다. 그 불꽃놀이가 끝나고 난 자리에 남아있는 압도적인 슬픔과 은은히 풍기는 희망의 냄새는 그가 인기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그랬던 김애란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소설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니, '도착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싶다. 나는 「서른」 이후에 그 이상의 실패와 우울이 존재하지 못할 거라는 단정을 지었고 김애란 역시 동일한 생각이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2014년 이후 우리 사회가 보여준 현실은 최악보다 더 최악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더 실패하고 더 우울하고 더 악하고 더 속물스럽고, 그래서 더 인간 같아졌다. 김애란의 판타지와 발랄한 문장은 이 소설집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김애란은 「바깥은 여름」에서 끝난 이야기를 이어간다. 충분히 절망한 줄 알았던 인물들을 다시 끌고 온다. 고시원 속 사람들 (노크하지 않는 집), 편의점에 가는 여자 (나는 편의점에 간다), 노량진에서 재수를 하던 아이들 (자오선이 지나갈 때), 사랑했던 여자를 위해 중국어를 공부한 남자(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아는 언니에게 죄를 털어놓았던 그녀 (서른). 그들이 얼어붙은 시간을 통과해 그다음 계절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에 멈추어있다. 아이를 잃거나, 남편을 잃거나, 오래된 사랑을 떠나보내고. 그들이 속한 시간과 바깥의 계절이 너무나 달라져 있어서, 그 시차가 견딜 수 없이 무서워서 말이다.
더 이상 김애란은 불꽃놀이를 쏘아 올리지 않는다. 유려한 문장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고 인물들은 갈 곳을 잃었다. 모두 무너지고 망가진 자리 곁에 주저앉아 작가는 그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결국 「바깥은 여름」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나아갔다고 생각된다. 나는 세계에 대한 김애란의 인식이 확연히 달라진 것이 반갑고 또 그만큼 슬프다. 판타지로 중화되거나 희망을 암시하는 결말들이 「바깥은 여름」에서는 여지없는 실패로 마무리 지어지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러면서도 김애란은 노골적으로 절망을 전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애란은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바깥은 여름」의 목차는 「입동」에서 시작해 겨울 같은 실패를 나열하다 결국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라는 작품으로 끝이 난다. '이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야'라는 말과 '이 세상은 끝났어'라는 말이 똑같이 들릴 때, 그 사이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이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아가는 사람들 곁에 말이다. 어떤 순간에는 답을 내리는 것보다 그저 질문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욱 위로가 되니까. 김애란이 이 소설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나 역시 그 질문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까. 작가도, 독자도, 소설 속 인물도. 우리 모두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고민하다 보면 섣부르게 희망과 종말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꼭 전해주고 싶어 진다.
김애란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