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 문학동네
이번 리뷰만큼은 편지의 형식을 빌려서 쓰고 싶었어. 이런 식이 아니면 써지지 않았다고 해둘게. 하고 싶은 얘기가 뻗어나가지 못하고 계속 맴돌다가 죽어버리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런 거 있잖아. 몇 번을 써도 실패하게 될 글 같은 거. 몇 번을 반복해도 실패하게 될 시간 같은 거. 결국 어떻게 써도 실패하게 될 거라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방식으로 실패하고 싶었어.
실패를 예정한 이 글을 다 마쳤을 때는 어떤 모양이 되어있을까. 그게 궁금해서 시작해볼까 해.
우리 보통 '마음대로'라는 말을 자유자재로, 혹은 멋대로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우리가 마음을 부리는 방식이 그렇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과연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걸까? 사람의 마음을 하나의 나라(State)라고 해볼게. 이 나라에는 시민(생각)이 살고 건물과 도로(논리)가 도시를 구성하고 법(이성)이 있으며 자연(감정)이 존재해. '나'라는 자의식, 자아 역시 마찬가지로 '마음'이라는 나라의 한 구성원이야. '나'는 누굴까. 이 나라의 왕·독재자라고 해볼까. 이 독재자는 이렇게 믿고 있어. 시민은 자신에게 복종하고 건물과 도로는 견고하고 법은 오류가 없으며 자연은 통제의 대상일 뿐이야. 그리고 믿음은 '마음'을 지배하는 신이야. 독재자는 믿음을 독점하고 교리를 전파하는 제사장이기도 해.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마음'에 침입해서 신은 가짜고, 왕은 사기꾼이라는 소문을 퍼뜨리지. 이 나라를 지탱하는 믿음이 흔들릴 때 '나'는 위기에 빠져. 생각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논리는 무너지고 이성은 무력화되고 감정은 재앙으로 돌변해. 제국은 몰락하고 독재자는 도망쳐. 나의 마음이 나를 쫓아낸 거야. 모든 권력을 잃어버린 왕은 마음의 변방에서 홀로 고민하기 시작해. 정말 신은 가짜인 걸까? 그럼 신을 대체할 '진실'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 어디까지 나의 마음 안에서 도망칠 수 있는 걸까.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디어 랄프 로렌」은 이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미국의 대학원에서 10년간 공부에 매진하던 종수는 어느 날 그의 지도교수로부터 퇴출당해. 이유는 그저 '자네는 그냥 여기와 어울리지 않는 거야'라는 말 뿐이야. 그는 극심한 좌절감에 시달리며 자기 집을 때려 부수던 중에, 그가 오래전에 숨겨놓았던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해.
"디어 종수, 나는 아주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편지의 발신인은 그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수영'이란 클래스 메이트야. 종수는 그녀와 함께 랄프 로렌에게 보낼 편지를 썼었다는 걸 기억해내. 그 편지의 내용은, 랄프 로렌 브랜드의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것. 랄프 로렌 컬렉션을 완성하기 위해 맥도널드에서 알바를 하던 수영은 영어를 잘 할 것 같은 종수에게 영역을 부탁했던 거야. 지난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의 기억을 떠올린 종수는 그 이후 랄프 로렌에 관련된 모든 것을 광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해. 종수는 자신이 이 지경이 된 이유가 [수영-랄프 로렌]에 있다는 근거 없는 직관으로 그 일에 뛰어드는 거야. 자신의 마음에서 쫓겨난 한 남자가 아무런 의미도 쓸모도 없는 기묘한 여행을 떠나면서 소설은 시작하지.
「디어 랄프 로렌」을 이루는 두 축은 '진실'과 '착각'이라 할 수 있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잘 들여다보면 구분이 잘 가지 않아. 진실이라 믿어왔던 게 착각에 불과했고, 착각하던 것들이 어느샌가 나를 관통하는 진실이 되어있을 때도 있지. 그래서 사람들은 둘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거나 왜곡된 진실에 머물러 있기를 택해. 손보미는 이 소설 안에서 인물들의 일련의 선택들을 근사한 이야기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어. 의미 없는 것들, 무용한 것들을 통해.
「디어 랄프 로렌」은 마치 종수가 이 책의 저자인 것처럼 설정된 일종의 페이크 에세이야. 이 '가짜 이야기'안에는 의미를 잃은 것들, 허구적인 것들이 부유해. 다양한 인물들과 이야기가 마치 만화경처럼 다채롭고 생동감 있게 소설을 이루고 있지만 어쩐지 그 결은 하나같이 쓸쓸해 보여. 그건 이야기가 전해지지 못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소설에서 여러 번 말하고 있거든. 조셉 프랭클의 편지, 랄프 로렌의 이면, 고양이 태비, 종수와 섀넌이 헤어질 때 서로에게 남긴 자국의 말들, 그리고 이 글 전체가 전해지지 못하는 이야기들이지. 즉 손보미에게 의미 없(어보이)는 것들은 전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잃는다고 볼 수 있어. (전해지지 못한다는) 불가능은 (어쩔 수 없다는) 불가피로 귀결돼. 그 상실의 부표가 진실과 착각 사이에 놓인 바다에 둥둥 떠 있는 거야.
손보미가 만들어놓은 '전해지지 못하는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과 닮았어. 손보미가 이 소설의 무대를 한국과 미국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을 거야. 나는 어쩌면 그게 타인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거라 생각했어. 나라마다 쓰는 언어는 분명 다르지.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마음의 관점에서 모든 타인은 외국인이야. 나는 너의 마음을 온전하게 알아듣는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난 그것을 나의 말로 번역해서 받아들일 뿐이야.
번역은 필연적으로 소통의 불가능성을 초래해. 너의 마음 안에는 내가 영영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는 거야. 이게 마음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진실이야. 말이 통하지 않는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지. 그 두려움이 하여금 오해하게 만들고 환상을 씌워 내 식대로 해석하게 해. 그래야 안심할 수 있거든. 이건 마음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착각이야.
종수는 처음부터 수영이 자신과 같은 소위 말해 공부하는 부류가 아니라고 판단해. 수영이 알바를 하고 랄프 로렌에 집착하는 거에 대한 관성적인 거부감이 있어. 하지만 수영의 진지한 열정과 순수함에 끌리지. 종수에게 있어 금지된, 그의 시스템 바깥의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매료된 거야. 하지만 결국 그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수영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동일시하려 해. 자신의 삶이 궤도를 이탈하고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는 게 두려웠던 거야. 그래서 종수와 수영은 멀어지고 자신의 세계에 외롭게 남은 종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 괴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쳐 결국 10년이 지나버린 거야. 자, 이제 몰락한 왕들이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얘기할 때가 됐어.
이 소설이 나를 한없이 따뜻하게 만드는 몇 가지 장면이 있어. 이를테면 수영이 종수에게 자신의 랄프 로렌 컬렉션을 자랑하던 독서실, 레이철 잭슨 여사와 종수가 녹음기를 두고 나누었던 기묘한 '대화', 조셉 카터와 그의 아들 헨리가 전해주는 조셉 프랭클의 이야기, 섀넌과 종수가 함께 로라 무어의 녹음본을 들었던 밤. 이 장면들 속에서 인물들은 같은 시·공간에 머무르고 있지만 각자 다른 생각과 감정으로 상대를 대하지.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소통에 실패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어. 불가능성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거야. 이 아름다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신기하게도 전해지지 못하는 것들은 의미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매혹적으로 변해. 불가능성은 이야기에 비밀을 심고 불가피는 그 비밀을 알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지.
소설 속 인물들은 무용한 일들에 끈질기게 매달리고 고민하고 또 즐겨. 그들은 그저 할 뿐이야. 종수는 랄프 로렌을 조사하고, 조셉 프랭클은 권투를, 기쿠 박사는 피겨 스케이팅을 하지. 다만 그들은 자신의 일들을 절대 치켜세우거나 대단한 의미를 씌우려 하지 않아. 다만 우리는 그 시간 낭비에 가까운 일들이 어떻게 그들을 살게 하는지를 보게 될 뿐이야. 진실(불가능성)을 깨달은 왕들은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아야 해. 신이 없는 세계, 내가 믿던 것들이 전해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면, 묻혀버린 세계 속에서도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해. 선과 악, 과거와 현재, 언어와 비언어가 혼재된, 나조차 알 수 없는 마음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거야.
손보미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어. 이 소설은 진실과 착각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지. 이 소설이 품은 아름다운 하나의 진실과 착각을 소개해보려고 해.
수영이 랄프 로렌에게 보내는 편지의 첫 문장, [디어 랄프 로렌]은 수영의 순수한 진심과 그 언어만의 따뜻한 느낌, 그리고 타인이 왜곡할 수 없는 고유함을 지니고 있어. 하나의 진실은 수영이 것이야. 그리고 하나의 착각은 섀넌의 것이지.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말해주며 토닥이는 손길. 종수는 끝내 자신이 좋은 사람이란 걸 믿지 않았지만 그래서 이 말은 착각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사랑이란 게 어쩌면 그런 거라고 생각해. 기꺼이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착각의 능력. 그런 순간은, 이 세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몇 없는 행운이라고 나는 믿어. 진실과 착각의 갈림길을 영영 헤매고 다니며 그 사이에 숨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거, 이야기가 하는 일이겠지.
이런 아름다운 순간들은 절대 나 혼자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들이지. 너와 나의 마음 사이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것들이야. 이 세계가 연결되어있다는 건 그런 점에서 유효해. 전해지지 않는 이야기들은, 우리의 비밀 같은 마음은 언젠가 너와 나 사이로 돌아올 거야. 사라지지 않아. 그런 게 잭슨 여사가 말한 '좋은 일'이란 걸 테지. 그걸 기다리고 있어. 이만 줄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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