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다 마모루, "시간을 달리는 소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끔찍한 일을 저지른, 내 생에 가장 후회하는 그 날로 돌아가서 마냥 바보 같고 한심한 나의 모습을 조금은 멋지게 바꿔놓고 싶은 그런 상상을 말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마코토는 우연히 '타임리프'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마코토가 하는 일이라고는 노래방 무한대로 즐기기, 튀김 잘 튀기기, 지각 안 하기, 시험 점수 잘 받기 등등,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마코토가 타임리프를 마음껏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이모가 말한다.
마코토가 이득을 보는 만큼, 손해를 보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마코토는 누구와도 싸우려 하지 않는다. 누구와도 껄끄러운 일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코토가 신경 쓰는 것은 딱히 기분 나쁜 일 없는, 용돈이 부족할 일이 없는, 맛있는 것을 많이 먹을 수 있는, 평범하고 행복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코토는 치아키의 사귀자는 고백을 시간을 되돌려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고, 이과인지 문과인지 두 개의 선택지 밖에 없는 진로를 쉽게 정하지 못한다. 마코토는 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대로 단짝친구인 치아키, 코스케와 텅 빈 운동장에서 야구나 하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 마코토가 자신의 하루를 완벽하게 만들자 타카세라는 어리숙한 남자애는 고약한 괴롭힘을 당하게 되고, 치아키를 지키려고 하자 친구 유리가 다치게 되며, 치아키의 고백 이후 그를 피하면서 문제없던 우정은 금이 가버린다.
시간은 반드시 무언가를 변하게 만든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아무하고도 싸우고 싶지 않은 마코토는 역설적으로 타임리프를 할 수 있게 된 이후부터 시간 그 자체와 싸우게 된다. 소녀는 변하고 싶어 하지 않고, 시간은 소녀와 소녀를 둘러싼 세계를 변화시킨다.
이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시간이다. 마코토는 시간을 멈추지 못한다. 타임리프는 쓸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고, 마코토가 바꿀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최선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만족하는 순간 코스케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기차로 돌진한다. 관객은 '멈춰'라는 수 없이 말을 반복하는 마코토를 보며 무력함을 절감한다. 시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소중한 마음도, 사람도, 장소도, 나 자신도. 코스케를 구하기 위해서는 치아키가 떠나야만 했고 마코토는 예정되지 않았던 이별을 눈뜨고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달라졌고 다 망쳐버렸다. 아마 마코토는 그게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도 어쩔 수 없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일반적인 교훈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영화가 하는 일은 그런 게 아니다. 불가능한 일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영화의 역할이다. 절망에 빠진 마코토에게 이모는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꺼낸다. 다시 만나자 약속하고 기다리다 이렇게 오래 시간이 흘러버렸다고.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후회하는 건지, 포기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이모는 말한다.
그렇지만 마코토, 너는 나 같은 타입이 아니잖아.
약속에 늦는 친구가 있으면 달려가 맞아주는 게 너잖아.
기다리고만 있을 때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직접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들이 있다. 평생 모든 게 그대로 일줄 알았던 마코토는 그제야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변해서 친구들이 자기도 모르는 새 떠나가는 것보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자신의 의지로 작별하고 보내주어야 한다는 걸.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설사 잃게 되더라도 반드시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다.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되돌릴 수 없다는 슬픔을 기꺼이 떠안은 채 마코토는 달려간다.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세상이 뒤집힐지도 모르는 시대 속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낸 사람이 있었고, 그 그림을 보려고 미래에서 온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을 지켜내기 위해 다시 그를 미래로 보내준 사람이 있었다. 아마 그들 모두 시간과 싸워 변해버린 것들을 흘려보낼 때에도, 항상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믿고 있지 않았을까. 그게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말해주고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만드는 건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라고 마음먹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만이 누군가를 기다릴수도, 누군가를 향해 달려갈 수도 있지 않을까.
마코토는 치아키를 앵글 바깥으로 밀어내 작별인사를 나누고 화면의 중간으로 걸어간다. 다시 돌아봤을 때 이미 치아키는 없다. 마코토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치아키가 사라졌던 앵글에서 다시 나타나 마코토에게 걸어온다. 치아키가 마코토에게 속삭인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응, 금방 갈게
달려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