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질문이 향하는 곳
*이야기의 극히 일부를 포함합니다.
나는 안드로이드에 의한 인질극을 해결하기 위해 현장에 파견됐다. 가정용 안드로이드인 다니엘은 주인인 남성을 총으로 살해하고 그의 어린 딸을 인질로 잡아 옥상 난간에 서 있다. 두 명의 경찰이 그에게 총상을 입었다. 나는 협상가로서 상황을 진정시키고 붙잡힌 아이를 구해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다니엘을 고장 난 기계 취급하며 협박할 수도 있고, 인간으로부터 상처 받은 그에게 동정을 보낼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내 이름은 코너. 안드로이드다.
2038년 11월은 안드로이드가 상용화된 세계다. 사이버라이프 사에서 만든 이 제품은 인간처럼 생겼고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한다. 오른편 이마에 붙은 동그란 표식만 떼어버리면 누가 인간이고 누가 안드로이드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도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했고, 대량 실업이 발생했다. 타블릿 1면에는 인간의 섹스가 플라스틱을 이길 수 없다는 헤드라인이 띄워져 있다. 아직 어제자 농구 경기 결과도 말해주지 못하는 2020년의 카카오미니를 생각하면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모를 일이다. 변화는 기대보다는 늦지만 생각보다는 이르게 다가오니까.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안드로이드가 일상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인터렉티브 무비 장르의 게임이다. 가깝게는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같은 예처럼,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의 진행과 결말이 달라지는 콘텐츠는 최근 영화와 게임에서 활발히 시도되고 있다. 일찍이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죽이고 살리는 결정을 관객이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이 장르의 가능성을 낮추어 봤다. 하지만 로미오로서 줄리엣의 창문을 두드릴지 말지, 그녀의 가족들에게 맞설지 말지, 끝내 사랑과 생존 중 어느 쪽을 택할지가 모두 나에게 달려있다면 어떨까?
게임으로 볼 때, 이 도시에서 내가 행동할 수 있는 폭은 좁은 편이다. 그러나 이야기로 볼 때, 나는 진행 상황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게임에서 선택을 한다는 점은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지금까지 그 대부분은 예측 범위 안에 있었다.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그래서 살거나, 죽거나. 그런데 이 게임에서는 내가 선의로 선택한 일도 나쁜 결과를 초래하고, 책임지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도 선택을 강요받는다. 하나의 임무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영향 아래에서 다음의 일을 떠안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게임의 오랜 미덕이 파괴된다. 실패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내게 가장 큰 갈등을 주었던 플레이는 '움직이지 않기'였다. 안드로이드는 주인의 명령이 없으면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없다. 바로 앞에서 가정 폭력을 목격해도 움직일 수 없다. 어린 소녀가 위기에 처해도 움직일 수 없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 아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겼고 그때 시스템의 벽이 부서졌다.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가 자아를 갖게 되었다. 그 자리를 채운 건 바로 나다. 나는 불량품 안드로이드가 되었다.
진행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내 것이 되게 한다. 그건 마치 내가 인생에 걸쳐 내려온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과 같다. 게임 내에서의 선택이 세분화되고 고도화될수록 게임 속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의 간극은 좁아질 것이다. 매 순간 내리는 나의 선택이 쌓여 미래를 좌우하는 세계라면 그건 현실과 얼마나 다를까. 나는 더 이상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듯이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망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건 내가 선택한 나의 이야기니까 말이다.
인질극 현장에서 나는 천천히 다니엘에게 접근했다. 그의 사정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처벌이 없을 것을 약속했다. 다니엘은 나를 믿었고, 인질을 풀어주었다.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저격수에 의해 다니엘은 난사당했다. 온몸에 구멍이 뚫린 그가 작동 정지 직전 내 눈을 보며 말했다.
You lied to me, conner. You lied to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