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오버쿡드>라는 전쟁터

by 정재광



과열된 냄비에서 시작된 불이 도마로 옮겨붙고 있다. 토마토를 가지러 가던 나는 먼저 소화기를 들고 불을 꺼야할지 잠시 고민한다. 멈춰있는 내 걸음을 보고 셰프는 뭐하고 있냐며 소리친다. 주문은 이미 세 개나 밀려있다. 일단 불을 끄고 토마토를 다시 가지러 간다. 셰프는 그건 됐으니 완성된 요리부터 서빙하라고 지시한다. 접시를 들고 가던 나는 실수로 쓰레기통에 음식을 쏟는다.


야!!


이곳은 전쟁터다. 아니, 주방이다.


<오버쿡드(Overcooked!)> 시리즈는 요리 시뮬레이션 코옵(Co-op:협동) 게임이다. 2인 이상의 플레이어가 정해진 순서에 따라 간단한(?) 요리를 완성해서 정해진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이 서빙하면 된다. 다만 세계 모든 주방의 생리가 그렇듯, 핵심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고객의 인내심은 게이지와 함께 줄어간다. 동선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려면 철저한 분업과 긴밀한 협력이 요구된다. 나는 양파를 썰 테니 너는 설거지를 하거라. 그런 것이다. 마음을 맞춰 주문서를 털어낼 때의 카타르시스는 내 동료를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첫 스테이지까지는 그렇다.


협력을 방해하는 요소는 게임을 거듭할수록 고도화된다. 열심히 칼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마와 렌지의 위치가 바뀌는가 하면 얌체 같은 쥐들이 나타나 꺼내놓은 재료를 훔쳐가 버린다. 떠다니는 배 위에서 요리를 해야할 때도 있고, 심지어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날아오기도 한다. 미션을 막아서는 난관은 모든 게임 디자인의 기본이지만 이 게임은 사람의 관계를 건드린다는 게 문제다. 햄버거 주문이 먼저 들어왔는데 파트너는 피자 도우를 가지러 가고 있다든가, 바로 옆에서 불이 나는데 태평하게 토마토나 가지러 가고 있다든가. 한쪽에서는 분노가 치솟아 오를 만한다. 하지만 나도, 아니 다른 한쪽도 분명 우선순위를 고려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다를까.


Overcooked! (Ghost Town Games Ltd)

서로 아껴주고 믿어주기로 약속했지만 매번 그러지는 못하는 게 연애의 실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관계를 맺고 연애를 하고 다투고 조정하고, 다시 아껴주고 믿어주기로 약속한다. 그건 둘이 하나가 되겠다는 원대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한다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오버쿡드>는 절대로 혼자서 클리어할 수 없다. 가던 길이 막히고 불난리가 나는 이 모진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동사는 '함께'라는 부사를 방패로 삼는다.


그리하여 공생 자체가 목적이라는 단순한 전제를 확인하고 처음으로 돌아왔다. 같이 해야하는 건 알겠는데 여전히 잘 되지 않는다. 인내란 무엇인가, 철학적 고민에 빠진다. 이제 어쩌지? 내가 <오버쿡드>를 하면서 느낀 바는 이렇다. 결국, 대장이 필요하다. 둘이서 하는 게임에 무슨 대장이 필요하냐고 지적하기 전에, 리더의 개념을 조정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권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지휘하는 포지션을 맡은 사람이다. 둘밖에 없는 그룹에서도 전략을 세울 플레이메이커는 필요하지 않을까?


오해는 금물이다. 이건 내 대장의 명령이나 사주를 받고 쓰는 글이 아니다. 그녀는 공명정대하며 자애를 겸비한 인물로서 매사에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아니 여기까지만 하자. 내가 말하려는 건 모든 관계가 평등을 전제하고 또 지향한다는 점 때문에 적합한 역할을 부여할 때 주저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나의 연인을 나의 리더로 인정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더구나, 그것이 분초를 다투는 주방에서라면 말이다.


Overcooked! (Ghost Town Games Ltd)


이제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고 주방에 뛰어든다. 날아드는 건 왜 양배추 빨리 안 가져오냐는 대장의 힐난이다. 내 딴에는 고기를 먼저 구워서 동선을 줄이려 했다고 해명하고 싶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더 혼날 게 뻔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 같은 건 기분 탓이다. 정신을 차리자. 내 파트너는 나보다 전체를 보는 능력이 뛰어나다. 일의 선후를 재빠르게 분별해낼 수 있고 동시에 여러 작업을 할 수 있다. 때문에 내가 머리 굴려 생각한 것이 그녀의 총괄적 사고에 미치지 못할 때, 내가 느끼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사랑과 존경, 그것이다.


언젠가 나는 내 연인과 함께 가정을 이룰 것이고 스튜디오를 꾸릴 것이다. 함께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행할 일이 많을 테다. 그럴 때 어떤 방식으로 일해야 할지 이제 나는 알 수 있다. 내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고, 내 부족함을 지적받는 것 같다면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을 떠올려볼 일이다. 사랑으로 들었을 때 그 모든 것은 옳은 판단이 되고, 우리를 평화로 이끄는 말씀이 된다. 우리는 시간 안에 음식을 서빙하고 별 세 개를 딸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형태이고 사랑의 과정이다.


사랑이 없으면 관계도 지속하기 어렵지만 사랑이 없으면 무엇보다 <오버쿡드>를 할 수 없다. 이곳은 주방이다. 아니, 전쟁터다. 짐 자무시의 영화에서 죽음을 앞두고도 온전히 서로에게 의지하는 뱀파이어 아담과 이브를 기억하자.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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